살인의 시간이다. 휴학생 법학도 라스콜니코프. 살인의 대상은 전당포 고리대금업자 노파 알료냐다.

때는 늦은 7시 반. 헝겊에 싼 도끼를 꺼내 순식간에 노파의 머리를 찍는다. 그리고 선량한 목격자 리자베타까지도. 전당포 물건도 훔친다. 살인 후 주인공은 공포 속에서 자신의 내면의 감옥 속으로 끝없이 도망간다. 그가 피를 흘린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끝까지 주인공을 추적한다. 혼절을 거듭하고 있는 주인공은 노파의 전당포 물건을 찾아간 마지막 용의자였다. 그리고 주인공이 작성한 대학논문이 눈에 띈다.

“사람은 보통인간과 초인으로 구별되는데 나폴레옹과 같은 초인이 피를 흘리는 것은 허용된다.”

법대를 휴학한 자신과 가난한 이웃들을 볼 때 잘못된 부를 축적한 노파를 죽여 그 부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사회적 정의라 판단한 그는 자신이 ‘이’인지 ‘인간’인지 실험하고 싶었다. 판사는 자백하지 않는 범죄인을 끝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황색도포를 두르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팔던 소냐. 그녀 앞에 선 주인공은 세 번째 만남에서 살인사실을 고백한다. 아마도 소냐의 모습속에 비친 여동생 두냐가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노파를 죽인것은 자신을 죽인것이며, 그녀가 자신의 몸을 판 것 또한 자기 살인이라고 말한다. 그에겐 여전히 살인은 죄가 아니다. 그에게 속삭이는 소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지금부터 곧 나가서 네거리에서 서세요. 그리고 맨 먼저 당신이 더럽힌 대지(大地) 위에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온세상을 향해 큰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세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해주십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 앞에 엎드린다. 자백과 함께 떠나는 7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그는 범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주인공의 말대로 살인은 자기실험이며 자기살인이었을까? 그의 내심에는 법에 대한 살인이 잠재하고 있었는 것 아닐까. 휴학한 이유가 학자금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의욕상실 때문이었다는 그의 실토 속에는 고리대금업자가 폭리행위를 자행함에도 이를 방관하기만 하는 법의 무기력함 앞에 좌절한 한 청년의 모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법이 사회적 정의를 외면하고 강자의 권리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법에 대한 신뢰는 허물어져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휴학생 법학도의 모습에 추락해 가는 한국 법조계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것은 보고싶은 것을 보는 인간의 속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살인이 죄임을 알면서도 범죄로 보지 않는 것에는 실정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그 한계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법률은 포기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다소 현실에서 소외된 법률이라 할지라도 때로 그것이 우리 삶을 속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포르피리 판사가 필요하다. 법은 우리 삶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법적 안정성이 흔들릴 때 사회는 무질서해지게 된다.

라스콜니코프는 누구 앞에 자백했는가? 포르피리 판사가 아닌 창녀 소냐였다. 하지만 포르피리 판사가 그를 심문하지 않았다면 소냐를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소냐가 없었다면 포르피리 판사가 사용하는 법률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법은 무기력하고 법과 정의와 동떨어진 사랑은 맹목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법과 도덕과 종교는 함께 손잡고 갈 때 각자가 추구하는 진리와 정의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 우리는 주인공의 의식세계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존재’와 ‘비존재’, ‘이’와 ‘인간’, ‘범인’과 ‘비범인’, ‘선’과 ‘악’, ‘죄’와 ‘벌’ 등 이분법의 세계에 갇힌 그는 자신이 정해놓은 주관적 정의를 진리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갇힌 이분법의 감옥 속에서 헤어나게 한 구원자는 다름아닌 소냐였다.

법이 인간을 강자와 약자를 양분한 다음 한쪽만의 이익을 위한 대변자가 된다면 법 스스로가 이분법의 감옥에 수감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지 않으면 소설 속 회심 전 라스콜니코프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 인간세계에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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