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여행지에서도 내가 가장 충만했던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였다.
모스크바 어느 골목의 작은 성당에서 연말 미사를 보는 할머니들 사이에 영문도 모르고 서서 나도 덩달아 낮고 고요했을 때,
아침에 눈을 뜨고도 침대에 누워 아직 밝아오지 않은 방 안에 빛의 발걸음이 닿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럴 때.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고, 감탄할 만큼 세련되지도 않고, 남에게 권할 만큼 신나지도 않은 그런 시간, 그 심심함 속의 평화와 충만.
한 줄기 햇빛 속 공중에서 떠도는 먼지 같은 그런 시간들이 없다면 生은, 또 여행은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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