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세밑에 난데없이 등장한 불가역이란 단어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불가역의 상처를 남겼다.

화학 실험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단어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한·일 양국 외교장관 회담에서 도출했다는 합의안에 떡하니 들어가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보름여가 지난 오늘까지 ‘졸속 합의’, ‘외교적 담합’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편차는 있으나 이번 합의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과반을 넘고 “잘못 됐다”는 응답이 “잘 됐다”는 응답의 2배가 넘는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합의문 발표 이후 자신들의 프레임대로 협상의 후속조치를 진행하며 한국정부가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합의에 따라 적절하게 해결되도록 노력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운을 떼더니 지난 5일에는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정례 기자회견에서 스가 관방장관이 “일본 정부가 우려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적절하게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표명했다”며 아예 소녀상 이전을 기정사실화하며 밀어붙이고 있다.

이로써 일본군 위안부 협정 문제의 이슈는 회담 결과의 당부(當否)에서 소녀상 이전 문제로 이동했고 우리는 소녀상을 이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싸움에 매몰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지난 2015년 12월 30일 이후 대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주한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문화재와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정권이 하는 일이라면 약방에 감초 빠지지 않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청을 높여 비호하고 나서는 어버이연합은 합의 결과를 수용하라며 소녀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또 다른 보수단체인 ‘엄마부대’는 할머니들이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이 오죽 어버이와 엄마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면 대학생에 이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효녀연합’, ‘효자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주장하고 나서고 ‘진짜 엄마부대’까지 나와 “진짜 엄마라면 내 딸이 위안부였어도 나는 용서할 것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고 호소하겠는가. 그야말로 헬조선이다.

헬조선을 떠올리다 연초에 경향신문에 기고된 손아람 작가의 ‘망국(望國) 선언문’을 읽고 이보다 더 작금의 답답한 심정을 묘사하기 힘들 것 같아 감히 작가의 허락도 없이 일부를 인용해본다. 이해하시리라.

“어려운 한 해 보내셨습니다.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올해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곳을 지옥이라 단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몫으로 더 나빠질 여지를 남겨두는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종말을 확신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상상력은 최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모든 시점을 우리는 그나마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조만간 이 순간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연초마다 마음을 들뜨게 하던 나긋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의 목록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진짜로 치유하는 희망의 언어를 들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소녀상으로 돌아가 보자. 평화의 소녀상은 1992년 수요집회가 시작된 지 강산이 두 번이 변한 20년이 흐른 2011년 12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일본대사관 앞에서 거리의 투쟁을 이어온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염원하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계획하여 수요집회 1000회째인 날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세운 것이다. 이는 그동안 범죄 피해자임에도 여자로서 쉽게 밝힐 수 없는 치욕스런 기억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오신 할머니들을 위해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호소였고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에 대해 침묵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러므로 소녀상의 자리야말로 불가역이다.

혹자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은 물론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번 합의의 유의미함을 강조할지 모른다. 그들을 보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명대사를 떠올리는 것은 나뿐인가.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 내 그들을 살려야 하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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