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안 난단다. 2차, 3차 계속되며 술을 많이 마셨고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 안이었다고 한다. 그 사이 남자는 안주머니 속의 빈 지갑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술집을 찾았고 주문을 했고 술과 여흥을 즐겼다. 남자가 경찰서 소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술집 주인의 신고로 이미 무전취식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 되어 있었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앞둔 피고인은 울먹이며 말한다. “제가 무전취식으로 징역을 받았는데 출소한 지 열흘 만에 또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요. 정말이요. 변호사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경우 정말이지 경미한 죄에 뒤따르게 될 엄청난 대가를 생각해 보면 그 남자가 한심하기도 하고 또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술값 몇 푼 때문에 또 다시 징역을 가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랬겠냐는 푸념이 그냥 변명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얼마 전 책에서 읽은 코르사코프 증후군이 생각났다. 이 사람들이 이미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전조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혹 가까운 미래에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평범한 일반인들도 과음한 다음 날,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흔히 ‘필름이 끊겼다’고들 한다. 이렇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중간 중간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을 신경심리학적으로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라고 한단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은 과다한 알코올 섭취 등의 원인으로 인해 티아민이 부족해지면서 유두체가 파괴되고 그 때문에 치명적이고 영구적인 기억 손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올리버 색스의 저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한 남자의 임상례가 등장한다. 나이는 49세에 머리카락은 희끗희끗 세었지만 머리도 좋고 단정한 외모의 지미는 열아홉 살 이전까지의 삶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말할 수 있을 뿐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는 심각한 코르사코프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지미는 기억이 끊겨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였고 저자는 이 모습을 보며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뇌의 다른 부분은 이상이 없으나 작지만 아주 중요한 부위의 신경세포가 파괴되었을 때 초래된 결과는 아찔했다.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 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 루이스 부뉴엘의 회고록 일부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문득 예전 어느 술자리에서, 자신은 술을 마시되 취하지는 않는다고, 술에 취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신중히 술잔을 기울이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 역시 기억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루이스 부뉴엘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곧 정체성과 직결된다. 이제 막 삼십대의 가운데 고개에 들어섰을 뿐이지만 지난 삶을 돌아보고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현재의 나라는 사람이 총체적으로 수긍이 간다. 언젠가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기억상실증을 꿈꿔 보기도 했다. 아프고 힘든 기억, 지우고 싶은 기억들은 부분적으로 삭제가 되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기억을 못 한다고 과거의 객관적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생이 부분적으로 단절된 불연속적인 존재로 혼돈에 빠지고 말 터이다. 시간은 추억을 정화시키는 작용도 하므로, 나의 지난 날 그리고 그 기억들은 모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 같다.

어느새 변호사 8년차에 접어들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런 저런 사건과 사람들은 있지만 그동안 변호사 아닌 인간으로서 나는 무엇을 하며 그 많은 시간들을 보냈는지 즐거운 기억, 순수하게 행복에 취했던 기억의 분량은 자신이 없다. 아무래도 나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지상명제로 삼은 나머지 마이너스 대출을 갚는 데 주력하고 끊임없이 유용한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닐까. 우린 당장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소유하는 데에 많은 돈을 쓰지만 실제 더 오래 가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경험을 위한 소비라고 한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조금의 투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새해다. 올해는 삶에 있어 무척이나 소중한 두 가지, 재화와 시간의 소비에 있어 좀 더 좋은 경험, 즐거운 경험에 비중을 두어야겠다. 그 경험들은 이내 내게 선명한 기억이 되어 결국 나의 삶, 나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리라. 정신없이 삶에 치이는 생활의 노예가 아닌 내 기억의 유일한 제조자임을 잊지 않고, 보다 주체적이며 충만한 영혼으로 살기를 결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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