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은 4일 시무식에서 “항소심은 ‘두 번째 1심’이 아니다”라며 “1심 법관은 최종심 법관처럼 최선의 결론을 내리고, 상급심 법관은 그 한계를 지킴으로써 판결을 쉽게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한번 내려진 사법적 판단은 좀처럼 변경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질 때 재판의 권위와 신뢰를 찾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시무식 발언은 하급심에서 충실하게 심리한 후 판결을 내리고 상급심에서는 이유 없이 하급심 판결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일견 타당해 보이는 대법원장의 말이 자칫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경시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하급심 판결이 좀처럼 변경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 판결이 완전하다는 전제가 성립돼야 한다. 보통 하급심 판결에 불만이 있어 상소를 하는 것인데 만약 잘못된 판결이 상급심에서조차 바뀌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소송 당사자에게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법체계에서 대법원장의 말 한마디가 일선 판사들에게 일종의 내부 지침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사법부의 수장이 심급제도의 의의를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의 핵심을 이루는 심급제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오해 살 말을 새해벽두부터 꺼내놓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법관의 독립에는 정치권력이나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법원 내부로부터의 독립이 당연히 포함된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 개개인이 얼마나 내부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원장이 나서 상급심 재판을 맡은 법관에게 부담을 주는 지침적인 성격의 말을 한다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대법원장은 하급심 판결을 바꾸지 말 것을 주문하기 전에 하급심 강화방안을 밝혔어야 한다. 하급심 강화를 위한 인적·물적 시설을 정비하고, 판사 수를 늘리고, 하급심에 우수한 판사를 우선 배치하여 충분한 변론과 충실한 심리가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개혁안을 내놓았어야 한다.

또 전관예우 근절을 비롯한 국민들의 사법 불신 해소 방안도 함께 제시하면서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 확보를 통해 우리 사회에 판결 승복 문화가 자리 잡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어야 한다.

일선 판사들이 사건 떼기에 바빠 야근에 휴일 근무까지 해야 하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되는 한 국민들은 재판 과정이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공정하고 정당한 재판에 대한 욕구 불만이 해소되지 않는 한 항소나 상고 사건 수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대법원은 그동안 상고심에 사건수가 폭증하여 물리적 처리가 불가능할 지경이라면서 그 대안으로 상고법원 설치를 강력히 추진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 법사위는 하급심 강화가 우선이라며 상고법원 설치 법안 심의를 보류시켰다. 대법원장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 상고법원 설치가 사실상 무산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대법원장의 이번 시무식 발언이 혹 국민들의 상소의지를 꺾어 사건수를 줄이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제발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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