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기자의 시선
[법조기자실]깨달음의 언덕(彼岸)과 청와대, 그리고 위안부 문제
장용진 파이낸셜뉴스 기자  |  ohngbear@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574호] 승인 2016.01.11  10:07:2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어느 날 부처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다른 종교나 가르침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 부처의 대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뒤이어 부처는 “깨달음의 과정이 강을 건너는 것이라면 종교는 강을 건너는 배에 불과하다”면서 “강을 건넜으면 배는 버리고 가는 것”이라고 설법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강을 건너는 것’에 비유한다.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제도(濟度)한다’라고 하는데 ‘제(濟)’자가 바로 ‘건넌다’는 뜻이다.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것을 구원이나 천국으로 가는 관문에 비유하는 사례는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신화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는 것이라든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레테의 강’도 같은 맥락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상향의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는 ‘피안(彼岸)’이라는 말도 ‘강을 건너는 것’에서 비슷하게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피안’을 한자 그대로 풀면 ‘저쪽 강둑’이라는 뜻이다. 깨닫지 못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이쪽 강둑(此岸)’이라면 깨달음의 세계는 ‘저쪽 강둑(彼岸)’이라는 비유다.

나와 상대방의 입장이 같다는 뜻으로 쓰이는 ‘피차일반(彼此一般)’은 그런 비유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정치인이나 고위관료들이 잘 쓰는 ‘대승적 사고’라는 말도 ‘강을 건너는 비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큰 배에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다. 달리 말하면 보다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대승이요, 그 반대는 소승(小乘)인 셈이다.

그러니까 ‘대승적 사고’라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제하려는 누군가의 끊임없는 노력과 고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 어떤 목표를 향해 함께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목표를 공유하기부터 힘들고, 목표를 같이 한다고 해서 경로나 방식이 같으리란 보장은 없다. 설령 목표와 경로, 방식이 같다고 해서 처음의 생각이 끝까지 가라는 보장은 더더구나 없다.

‘대승적 사고’라는 것은 이 모든 차이와 분별, 갈등과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 양보하거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는 의미로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차이를 부각시키지 말고 같은 생각에서 출발해 이해의 폭을 넓혀 보자는 담대한 제안일 수도 있다.

최근 한국과 일본이 합의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법’과 관련해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한때 ‘반발이 진정될 때를 기다리자’라는 말도 나온 모양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반발이 거세질 뿐만 아니라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비판적인 견해가 늘어가는 형국이다.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다. 돈 몇푼에 피해자들의 존엄성과 역사를 팔아먹었다는 격한 지적까지 나온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한일 간의 합의가 불가피 했다며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미래지향적이라는 말과 국익이라는 말도 썼던 것으로 안다. 사실상 한일 관계를 위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양보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배에는 대한민국 국민만 태우면 되지 굳이 일본까지 태워야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만 다 태운다고 해도 이해관계가 얽혀 통합이 쉽지 않은 마당에 일본까지 태우고 가자며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더구나 일본을 우리 배에 태우기 위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같은 역사적·사회적 약자에게 양보를 요구할 이유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국제사회라는 것이 이해가 맞으면 함께하는 것이고 다르면 다른 파트너를 찾으면 되는 것인데 일본에 그렇게 매달려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과 같은 배를 타기 위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바닷물에 던져 버리려는 것은 아닌지 싶은 의구심이 든다.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그들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내팽개치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이번 위안부 문제 합의로 국내에서 논란과 갈등이 커지는 것을 보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버리고 얻을 수 있는 국익이 무엇인지도 의심스럽다. 설령 그렇게 해서 국익이 얻어진다고 해도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서 얻어지는 공익보다 클 것 같지도 않다.

청와대가 이미 깨달음의 언덕(彼岸)에 이르는 바람에 이쪽 언덕(此岸)에 있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사법개혁, 변호인 조력권부터 보호해야
2
“불법파견 겪는 노동자 모두 끌어안아야”
3
[국회단상]‘군 사법개혁’ 이제는 해야 할 때
4
[기자의 시선]타이밍에 대하여
5
[동서고금]두번 생각하기
Copyright © 2019 대한변협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koreanba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