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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변카페]293, 그들이 채워준 하늘
김희수 변호사, 사시 52회  |  pgoin.hop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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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호] 승인 2016.01.04  09: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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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을 보면 신기하다. 돔구장 천장에 별사탕을 박아 논 듯, 수없는 별빛이 하나의 평면에서 빛나고 있다. 알고 보면 하늘은 평면이 아니고, 별빛 하나하나가 개별적이다.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와 가장 가까운 ‘프록시마’라는 별은 약 4억 광년 떨어져 있다. 최고령별은 약 136억 광년 떨어져 있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별은 과거가 보내는 빛의 총합이다. 어른별, 아이별, 밝은 별, 어두운 별에서 발사하는 빛들이 동시에 내 망막 시신경에 안착한다. 전 우주적 규모와 시간을 고려했을 때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비단 밤하늘에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변호사가 만나는 사람들도 우연한 과거의 총합이다. 10년 전부터 90년 전까지 피고인들은 과거가 현재에 보낸 인연이다.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어떤 굴곡을 겪어 변호사 앞에 서게 된다.

춘천지법 항소심 국선전담변호사로 보낸 첫 해를 정리하면서 사건을 확인해 보니 총 293건이었다. 한 해 동안 293개의 성광(星光)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10개월간 약 70회 교도소에 갔고, 피고인을 약 450회 접견했다. 피고인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과거를 안고 왔다.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인생 여정까지 듣게 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피고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살점을 발라내는 것은 나의 역할이었다.

80대 노모를 불러 탄원서를 작성하게 했던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상해를 가했다. 나는 아버지의 처벌불원의사를 재판부에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고령에 와병 중이라 글씨를 쓸 수 없었다. 나는 피고인의 어머니를 불러 처벌불원의사를 확인했다. 그녀는 문맹이었던 터라 내가 탄원서를 작성하여 그 글씨를 ‘그리게’ 했다. 재판의 결과는 1년 6개월 감형이었다. 냉정할 것만 같았던 법정에도 진심이 통한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새벽에 동쪽하늘에서 반짝이는 신성(晨星) 같은 경험으로 기억될 것 같다.

뜻밖의 결과에 뿌듯했던 적도 있었다. 1심 판결대로라면 피고인은 2018년 여름에야 출소가 가능했다. 18년간 해외로 도피하다가 자수한 피고인은 무죄를 주장했다. 10번 가까이 접견을 할 정도로 재판 준비가 힘들었다. 그 피고인은 항소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얼마 전 자유인이 되었다. 피고인이 선고 직후 보낸 편지에는 “최선을 다해 준비해 주신 자료들과 완벽한 변론, 이 모든 것들이 재판장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피고인은 내가 엄청난 역할을 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피고인의 말을 들어주고 재판부에 전달한 것뿐이었다. 힘들어도 꼼꼼하게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교훈을 준 사건이었다. 앞으로 내게 희망을 비춰줄 항성(恒星)으로 여길 만한 경험이었다.

예상한 무죄가 나오지 않아 아쉬움이 컸던 사건도 있었다. 며칠 전 나는 이 피고인을 만나러 교도소에 갔다. “안녕하셨죠! 사건 이야기 하러 온 것은 아니고요, 다음 주에 출소하시면 뵙기 어려울 것 같아서 새해 인사드리러 왔어요. 결과가 아쉽지만 그래도 4개월 감형되어서 올해 말에 출소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죠. 사모님이 고생 많이 하셨으니 잘 챙겨주시고요. 나오시면 상고심 준비 잘 해서 명예회복하세요.” 이렇게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변호사님, 재판이 끝났는데도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꼭 식사라도 함께 해요.” 결과는 아쉬웠지만 내 가슴에 따뜻한 별자리로 새겨질 사건이다.

마음이 아팠던 사건도 있다. 선고 직전에 안타깝게도 피고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집행유예의 형이 너무 낮다며 검사가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나는 피고인에게 검사의 항소이유 및 실형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추가로 준비할 사항을 알려 주었다. 피고인은 긍정적인 양형요소를 갖추었고 재판도 잘 마쳤다. 그런데 피고인이 선고기일에 참석하지 않았다. 며칠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재판 결과가 잘 나올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자책감도 들었다. 절차에 대한 설명 외에 위로의 말이라도 더 해주었으면, 관심을 더 가져주었으면 불행한 일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별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붉은 색을 띤다고 하는데, 붉은 별로 아프게 기억될 것 같은 사건이다.

연초에 시간 여유가 많아 나는 어떤 노년의 피고인이 하는 하소연을 세 시간이나 들어준 적이 있다. 잠시 후 그는 활짝 웃으며 ‘사랑합니다’라고 적혀있는 화분을 사 들고 왔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응어리가 풀리는구나. 별똥별처럼 반짝거리며 지나간 2015년의 깨달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의 하늘에 상서로운 별, 경성(景星)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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