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대개 시인이라는 이들은 창백한 낯빛에 뿔테 안경을 쓰고 섬세한 성품에 쉽게 상처 받으며, 비쩍 곯아서 맨날 쥐어 터지지만 깡다구는 있어서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그러다가 더 두들겨 맞는, 그런 캐릭터일 때가 많다. 물론 시인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보통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를 벗어나는 시인 하나가 있었다. 시인이면서 명사수였고 글쟁이이면서도 폭탄을 다루고 침투 훈련까지 받은 사람, 이육사가 그다. 본명 이원록.

그는 진성 이씨다. 우리나라 유학의 태두이자 일본에서까지 명성을 떨친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그의 형제는 다섯이었는데 육사 말고 그 가운데 문학적으로 뛰어나 이름을 남긴 이가 넷째 원조다. 소설 ‘태백산맥’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문학가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이육사의 유고집을 냈던 이원조는 명랑하고 재기발랄했던 반면 이원록(육사)은 좀 엄숙하고 우직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원록은 곧잘 이원조의 ‘밥’이었는데 하루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이육사가 책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이원조가 냉큼 할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책은 성현의 말씀을 담은 것인데 책을 던지는 것은 성현을 집어던지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해 또 한번 형을 골탕먹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원조의 재기도 재기지만 이원록(육사)의 ‘한성깔’을 드러낸 일화.

일본과 중국 유학 후 1927년에 귀국한 이원록은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날려 버리려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의 첫 옥고를 치른다. 하지만 그가 이 의거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눈이 뒤집힌 일본 경찰이 그야말로 저인망으로 훑어서 감방에 처넣은 결과일 뿐, 재판에서도 나온 판결은 ‘혐의 없음’이었다. 그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조선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는데 이때만 해도 그는 ‘이활’이라는 필명을 썼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의 후폭풍으로 일어난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또 옥살이를 한다. 이 투옥 이후에야 그는 스스로를 이육사라 일컫기 시작한다.

264 수인번호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말은 정설로 돼 있지만 그 속내는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역사를 도륙낸다는 뜻의 육사를 썼고 다음에는 “고기먹고 설사한다”라는 뜻의 육사를 썼다. 전자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분노라면 후자는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냉소가 아니었을지. 그러다가 한 친지가 “역사를 도륙낸다는 건 혁명의 뜻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평평한 육지로 만든다는 이름을 써라”고 권유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 육사로 스스로를 일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역사를 평탄케 하는’ 노력에 몸을 던진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 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때에도 /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 이육사 ‘꽃’ 중

그는 툰드라 속에서 제비떼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의열단원 윤세주를 만나 중국 난징으로 가서 조선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녔고 이때 사격술, 변장술 등 무장 투쟁에 필요한 훈련까지 몸에 익혔다. 시와 글이 무기였던 그의 손은 방아쇠와 폭탄 던지기에도 익숙해졌다. 또 자신을 교양시켰던 의열단장 김원봉마저 “레닌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열혈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른바 ‘빵쟁이’였다. 나이 마흔에 열번 넘게 감옥을 들락거렸고 중국과 조선을 분주히 오가며 살았다. 그의 시 ‘절정’은 지독히도 추운 날 압록강을 건너며 또는 만주벌판을 헤매며 그가 내지른 비명같은 탄성이 뭉쳐서 나온 시인지도 모른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그는 그의 시 가운데 ‘청포도’를 좋아했다. “내가 어떻게 저런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는 자화자찬 비슷한 소리를 할 만큼 말이다.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고. 그러면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후세의 평론가가 갖다붙인 것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입으로 한 자작시의 해석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해방을 보지 못했다. 죽은 뒤에 발표된 그의 시 ‘광야’에서처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목놓아 불렀으나 그는 초인을 만나지 못했고 ‘청포도’에서처럼 하이얀 모시적삼을 식탁에 올려놓지 못했다. 1943년 조선에서 체포되어 거꾸로 중국으로 압송돼 1944년 1월 16일 짧지만 매웠던 생명을 다한다. 고문과 악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그가 쓴 수필의 이 구절을 되뇌지는 않았을까.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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