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해롭지 않은 착오는 없다”고 했다. 총선을 앞둔 요즘 정치판이 돌아가는 걸 보면 정치가 대중의 착오에 기반한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솔직히 공천권을 두고 이합집산하는 것이나 선거구 획정을 두고 벌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는 권력투쟁일 뿐이다. 그걸 두고 ‘국민을 위한다’거나 ‘이제 정치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구경꾼에겐 몹시 가소롭다. 여든 야든 모두 ‘혈안이 되어 있다’면 내가 너무 과장하는 것인가?

민주정치의 본질을 선동이라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선동이 빚는 ‘다수의 횡포’를 경고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모두’ 그랬고, 알렉시스 토크빌이 그랬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에서 더 나아가 개인에 대한 ‘사회의 전제(social tyranny)’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대중이 현명하지 않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선동에 휩쓸리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통치하는’ 원리인데도, 왜 대중은 인형극의 인형처럼 조종자의 손장난에 놀아나는 것일까?

정치적 선동은 그럴듯한 말로써 대중을 한곳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대중조작(大衆操作)에 우리는 너무 무력하다. 대중은 정치적 우상에 스스로 복종하고, 명망가의 선동에 알면서 속는다. 그 까닭은 선동에 쓰이는 정치적 언어가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대개 정치적 언어는 다의적(多義的)으로 해석되고 착오를 일으키면서 지지를 끌어낸다.

결국 정직한 정치인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적확(的確)한 ‘과학적’ 용어를 쓰는 훈련이 된 법률가가 정치인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다. 법률가는 사방에 적을 만들 뿐, 모호한 정치적 언어로 무장한 선동가를 이기지 못한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큰 거짓말을 할수록 큰 권력을 잡는다’고 한 말이나 히틀러가 ‘사람들은 큰 거짓말에 더 잘 속는다’고 한 말은 곧 선동이 정치의 첫 번째 전략이라는 말이다.

사실 오늘날은 정치판의 선동은 일상화되어 있다. 한 명의 선동가(demagogue)는 대중을 한 무리(herd)의 피지배자로 만든다. 그런 선동에는 정치적 언어로 뒤범벅이 된 거대담론과 대중을 속이는 장치인 프레임(frame)이란 게 있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로서 그 자체로 선동이다. 토드 기틀린이 프레임에 관해 한 기막힌 말이 있다. ‘우리는 그냥 보고, 그냥 듣고, 그냥 느낀다. 하찮은 소음은 미디어의 본질이다. 이러한 초점 없음이 정확히 우리가 처한 조건이다. 우리는 그 조건을 거부할 자유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보고 듣는 부지불식간에 대중은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프레임에 갇힌 대중은 속절없이 휩쓸린다. 특히 선거에서 프레임은 대단히 위력적이다.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가 대표적인 예다. 워싱턴 정치 경력이 없었던 빌 클린턴은 민주당 내에서도 진보파에 속했다. 조지 부시는 ‘현직 프리미엄’에다 걸프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클린턴은 부시를 ‘경제문제를 도외시하고 전쟁이나 하는 대통령’으로 만드는 프레임으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이었다. 클린턴은 경제를 살릴 후보가 된 반면에, 부시는 졸지에 경제에 무능한 대통령으로 몰렸고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도 유사한 경우는 많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들고 나온 ‘준비된 대통령’과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내세운 ‘국민후보’가 그렇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은 임기 말 외환위기로 추락한 김영삼 정부의 실정을 공격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자칫 노욕(老慾)으로 비칠 수 있는 네 번째 대선 도전을 ‘충분히 준비한’ 후보라는 장점으로 바꿔놓았다. 노무현 후보의 국민후보는 ‘인기 없던’ 민주당 후보 대신 내건 것이다. 자신이 ‘일반시민까지 참여한 치열한 경선에서 선출된 후보’라는 걸 강조한 것으로, 이념과 정책이 완전히 달라 야합(野合)으로 몰릴 수 있었던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국민적’ 합의로 바꿔놓는 놀라운 전략이었다.

어쨌든 다시 선거가 시작됐다. 야망가들의 선동이 벌써 넘쳐난다. 그 중에서 백미는 신당 급조와 당의 개명(改名)이다. 그러다 보니 10년이 넘는 정당이 하나도 없다. 정당민주주의는 정당이 이념과 정책으로 뭉친 결사체라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 정당은 그게 아니라 명망가와 추종자가 만든 붕당(朋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정당이 조폭과 다른 점은 물리적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들이 벌이는 선동의 게임이 우리 선거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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