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법조인들의 정치입문과 출마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법조인(판사, 검사, 변호사)의 역할을 넘어서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협회 공보이사 출신으로 협회의 숨은 역사를 쓰고 있는 나에게 이 계절에 생각나는 정치인이 있다. 바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인 김병로 선생이다.

대부분의 국민을 포함하여 우리 법조인들은 가인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맞서 법원의 독립을 지킨 훌륭한 대법원장으로 기억할뿐 변호사나 정치인으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초대 대법원장을 마치고 정치적 행보를 계속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사실 일제시대때 판사(1919년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 를 1년간 하다가 개업(1920년 4월 개업)한 변호사이다. 1926년에는 경성 조선인변호사회 회장도 하였으니 나름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모양이다.

일제시대의 법조인이라면 친일파 낙인을 벗어나기 쉽지 않은데 주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가인은 친일파 논쟁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해방 후 그는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였고, 미군정에서 사법부장을 역임하으며,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지금의 정치와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정치적이었다. 그가 순수한 법률가로 머물렀다면 아마 초대 대법원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관심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인의 모습은 대법원장을 마친 이후의 삶이다.

대통령인 이승만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쓰다 보니 법에 앞서는 정치의 힘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대법원장을 퇴임한 후 가인은 정치인의 길을 선택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가인을 주축으로 1960년 6월 18일 40여명의 변호사들은 7·29 민주선거에 다수 법조인의 진출을 돕고 자유로운 정치활동과 발언이 보장된 사회를 위하여 자유법조단을 창단하였다.

가인은 대법원장을 지낸 원로로서 측면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고향인 전라북도 순창에서 자유법조단 대표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낙선시킨 상대후보는 군법무관 출신인 민주당의 홍영기 변호사였다. 가인은 다시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한민국 4대 대통령 간접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당선된 바로 그 선거다. 1표만 득표하여 역시 낙선하였다.

가인은 1961년 5·16 혁명 이후에도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를 통하여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였고, ‘사상계’에 ‘군정 연장과 국민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한 뒤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을 촉구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 작업 등을 하였다.

1964년 1월 13일 간장염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향년 78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정치인이라는 관점에서 가인의 삶을 보면 초대 대법원장이 된 것이 기적에 가깝고 그는 야당 정치인,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살았다. 법의 정신이나 정치의 정신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모험의 길을 떠나는 많은 정치 지향 법조인들에게 실패하였지만 존경받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인의 모습이 혹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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