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년 전 취재차 방문한 강원도 영월에는 눈보라가 내리쳤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눈을 들면 사방이 설산(雪山)이라 여기가 하늘인지, 저곳이 산인지 분간도 없었다. 새삼 수백년 전 단종(端宗)이 걸어간 유배길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낯선 곳으로 출장을 와 허공에 둥둥 뜬 마음을 눈송이가 묵직하게 내리눌러 줬다. 춘천지법 영월지원은 고요했다. 화난 표정으로 빠르게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서초동 풍경과는 정반대다. 형사 재판정은 오래된 학교 교실 같았다. 재판은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이라 비공개로 진행됐다. 재판이 끝나고 만난 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감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그랬다.

#. 그해 서울 난곡동의 골목집에는 눈이 없는 아기가 살고 있었다. 국내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종락 목사의 자택 겸 교회였다. 그 집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걸맞게 가파른 언덕 위에 쓰러질 듯 서 있었다. 매일 새벽 미혼부모들이 800명이 넘는 아이를 버리고 간다.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는 장애아라서, 키울 돈이 없어서, 혼외자라서 이유는 많았다. 취재 당시 늦여름이었지만 추워하는 사람들만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이 목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베이비박스가 영아 유기를 조장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신생아방에서 아이들이 울고 보채기 시작하면 자원 봉사자들은 능숙하게 아기들을 품에 안고 달랬다. 우리가 서투른 부모 품에서 보낸 그 시절을 이곳 아기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보내고 있었다.

일상처럼 지나친 취재 현장이지만 유독 연말이 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2013년 현직 교사들의 성범죄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영월에 갔던 일, 같은 해 베이비박스 취재를 위해 난곡동 교회에서 지낸 일 등이다. 감각적으로 강렬한 잔상이 남아서 그런 듯하다.

검찰 담당 기자를 했던 2015년에도 여러 장면이 스쳐갔다. 대부분 비슷한 스토리의 비극이었고 주인공과 시간, 장소만 바꿔 상연됐다. 그래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사람들도 전부 잊어 버렸다. 그게 ‘그 일’이든, ‘그 일’이든.

망각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앞서 예로 든 개인적인 기억에 관한 두 장면은 돌이켜 보면 사실 미화된 부분이 많다. 영월 가는 날엔 청량리역에서 플랫폼을 착각해 열차를 한번 놓쳤다. 귀한 취재 타이밍을 놓칠까봐 역사 의자에 앉아 사연 있는 여자처럼 눈물을 흘렸다. 가는 내내 ‘돌아갈까. 어차피 공판 다 끝났을텐데’를 수십번 되뇌었다. 베이비박스 취재 땐 새벽에 오는 미혼모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사흘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엄마아빠들이 남긴 손편지 1000여장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분석하느라 취재가 끝난 몇 주 간 엑셀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시간의 흐름과 유한한 뇌 용량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여기 더해 인간은 ‘시작’과 ‘끝’을 만들었다. 연속된 시간들의 나열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달력을 만들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날이다. 여기에는 한번 넘긴 달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앞날을 꿈꾸며 다시 희망을 갖겠다는 우리 의지가 담겨 있는 것 아닐까. 매번 돌아오는 연말과 새해가 매번 의미있는 이유다.

연말과 새해가 의미 있는 건 겨울이라서도 있다. 추운 날은 더욱 모여들고 서로 챙겨줘야 한다. 평소 귀찮게 여겼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가족과 멋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비슷하게 귀찮아서 연락 안 했던 옛 학교 친구들에게는 전화 한 통씩 하고, 원래 게을러서 생각만 했던 소외된 이웃 돕기를 실천할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올해 내가 괴롭혔거나, 나를 괴롭혔던 모든 사람들에게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근심 있는 누군가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어차피 지나간 일들이다. 어차피 새해는 온다. ‘꿈을 잃거나 이루거나/ 그 다음 날을 다시 살아가잖아/ 걱정하지마/ 이 모든 게 꿈이야’ 라는 대중가수의 노래처럼 말이다. 모두에게 내년 한해 안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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