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지금 읽을 때의 느낌은 이제 전혀 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내가 처음 서시를 읽었을 때에는 사춘기 소년의 감수성을 표현한 것처럼 느꼈는데 지금 읽어보면 시인이 얼마나 순수한 영혼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부끄러움에 너무 민감해졌기 때문에 잎새에 스쳐가는 바람 소리를 들어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최근에 쉐임(shame)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부끄러움과 평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금지된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심각한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수치, 부끄러움, 손가락질, 쉐임 등의 단어들은 한결 같이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다른 눈을 주목하는 자신의 시각입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정확하게 묻자면 자신의 수치를 돌아볼 정도의 감수성이 남아 있습니까?

초등학교시절 여름 물놀이가 떠오릅니다. 내 기억 속에서는 남자아이들이 냇가에서 발가벗고 물속으로 다이빙도 하고 헤엄도 치는데 시골토박이들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리고 물속으로 뛸 때 서울에서 놀러온 아이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뛰어 놀았습니다. 나는 그 기억 때문에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대중목욕탕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탈의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옷을 어디까지 벗는지 눈치를 보고 움직여야 했었습니다.

나를 당혹하게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에 대하여 나는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지는 그 시대의 상황과 정신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은 사람의 윤리의식에 따라서 민감하거나 둔감해질 수 있어서 심지어 철면피를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할 정도에도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권한과 책임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권한과 책임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권한 있는 자에게 책임이 있고 책임을 져야하는 자에게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권한을 적절하게 행사하여 역할을 수행하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오로지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추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공직사회에서 흔히 발견되고 계약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나는 국세청을 상대로 하는 행정소송의 원고 대리인으로서 법정에서 변론한 적이 있습니다. 의뢰인에게 10년이 지나서 양도세부과처분이 내려졌고 이를 다투어야 하는 원고에게는 금융자료를 포함하여 많은 입증방법들이 어딘가로 흩어졌습니다. 재판장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찌릅니다.

“법원은 아직 사실관계를 모르니 입증부터 하시지요.”

법원은 증거능력이 있는 입증방법들을 원하고 있고 그 신빙성에 대하여 판단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자료들이 진실을 제대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법관들은 한정된 자료 속에서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까요? 살인현장에서 피 묻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항상 범인인가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특히 법의 함정에 빠진 사람은 더욱 그러한데 그 함정이란 개념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수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방은 누군가가 건져 올리지 않으면 구출될 수 없는 미끄러운 절벽입니다.

나는 많은 법조인들이 증거능력을 갖춘 증거들을 나열해놓고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믿습니다. 몇 가지 단서만을 가지고 예단을 내려놓고 나머지 증거들을 위 예단에 맞추어 재배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상황은 항상 존재하기도 합니다.

무죄를 외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뻔뻔하다고 평가하고 반성하지 않는다고 철퇴를 내릴 수 있습니다. 법의 이름으로 시작된 톱니바퀴의 흐름에서 빠져나갈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유죄가 선고되거나 억울한 행정처분을 감수하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하지 않은 법 시스템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볼 때에도 그 판결이나 결정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지 살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어떤 애절한 눈빛이나 따가운 시선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이 법조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를 더욱 혼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하늘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공직에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이 느끼는 부끄러움이 법조인의 감수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괴로워한다면 그가 바로 법대에 앉아야 합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