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폭력집회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12월 10일 조계사에서 나와 경찰에 체포됐다. 그가 조계사에 들어간 것이 11월 16일의 일이니 꼭 24일 만에 ‘은신’을 끝낸 것이다. 상당수 언론이 ‘현대판 소도’ 운운하며 한 위원장을 비판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소도’란 대체 무엇인가.

국어사전과 국사교과서 등에 따르면 소도(蘇塗)는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역 주민들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역이다. 소도에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매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워낙 신성한 곳이다 보니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감히 군사를 보내 잡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언론이 사용한 ‘현대판 소도’라는 표현에는 경찰이 종교시설에의 공권력 투입을 꺼리는 점을 악용해 사찰에 숨어든 한 위원장을 비아냥거리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도 ‘유탄’을 맞았다. 한 위원장을 조계사에 받아들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법 집행을 가로막았다는 비난이 그것이다.

물론 한 위원장 문제를 놓고 조계종이 일치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경찰과 민주노총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반면 일부 조계사 신도는 한 위원장 퇴거를 요구하며 물리력으로 그를 끌어내려 했다.

한 신문은 ‘소도는 없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조계종도 이제 사찰이 범법자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못 박아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돌아보면 1970∼1990년대에는 명동성당이 ‘현대판 소도’ 노릇을 했다. 그 시절 시국사범이나 반정부시위를 주도한 대학생,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도피처를 구했다. 2000년대 들어 광화문 등 서울 중심가에서 훨씬 더 가까운 조계사가 ‘현대판 소도’로 부상했다.

조계종은 “부처님의 품을 찾은 이를 내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산업화 등을 겪으며 기성의 권위가 거의 다 해체되어 사라진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범접하기 힘든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 종교계라는 인식을 반영한 결과다.

기자는 문화부에 근무하던 2012∼2013년 종교를 담당한 경험이 있다. 종교가 없어 종교 분야를 취재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여간 어렵게 느껴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부터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일명 ‘몰몬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일명 ‘통일교’)까지 다양한 종교 관계자를 접하며 차츰 흥미를 갖게 됐다. 성철 큰스님이 출가 전에 낳은 딸 불필(不必) 스님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만나 인터뷰한 일, 지금은 추기경이 된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의 착좌(着座)미사를 명동성당에서 지켜본 일 등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조계사와 명동성당 경내를 산책하길 즐긴다. 그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경건한 분위기 속에 의식을 진행하고, 절대자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란 얼마나 부족하고 미약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지금보다 더 훌륭한 사람, 인류공동체의 더 나은 구성원이 되고자 끊임없이 정진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법치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법치 못지않게 사회통합도 한국사회가 당면한 중대한 과제다. 정부가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했다면 법의 집행 시기는 좀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찰관들의 부상 등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각계각층의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경찰의 진입을 제지하며 한 위원장을 설득한 조계종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양의 격언 중에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은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온전한 정의의 실현을 위해 때로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 완벽한 심판이 있다면, 그래서 그 판정에 불복하는 행위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면, 소도 같은 개념은 없어져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소도는 모두가 신을 믿고 신을 공정한 심판으로 여겨 그에게 복종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오늘날 신을 믿는 이는 크게 줄었고, 종교의 힘도 예전 같지 않다. 비웃음의 의미를 담은 ‘현대판 소도’라는 용어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갈등의 골이 깊은 우리 사회에 그래도 소도와 같은 역할이 꼭 필요하다면 과연 누가 그 일을 맡아야 하나. 기자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소도의 기능을 떠안아야 한다고 본다. 억울하고 분한 이들 누구나 사법부의 문을 두드리고, 그 최종 판결에 승복하는 사회라면 굳이 법정 밖에 소도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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