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15년 달력이 한장밖에 남아있지 않음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달력의 며칠만 더 지나면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된다. 올해 초에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 가지 다짐을 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생활을 꿈꾸었는데 또다시 1년을 보내는 심정은 묘하기만 하다.

후회와 반성이 대부분이고, 잘하였거나 기뻤던 기억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 박하게 평가를 하였는가 하고 새로운 기준에 의하여 메모를 하면서 생각해 보아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시대를 읽어가는 혜안과 좌고우면하지 않는 소신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한 소망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러한 것들이 범인(凡人)들의 일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취임사는 꿈으로 작성하지만,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고 한다. 연말을 맞이하며 인사이동 내역이 언론에 발표되고 있다. 젊음과 인생 모두를 바쳤던 직장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받도록 강요당하기도 한다.

내일의 날씨를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올해 늦가을에는 비가 자주 내렸는데, 직장을 그만 두면 물 묻은 낙엽 신세가 되고 마는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피용자로 살아가야 하는 현재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한강물을 다 마신다고 하더라도 불안감과 갈증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해가 저무는데 저녁이 오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현재 근무하고 있던 사무실을 옮기라는 지시를 받게 되기도 한다. 타인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리를 옮기라는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사표를 내고 직장을 바꾸거나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종국적으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국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으로 남을 것인가,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으로 남을 것인가 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영원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인간이 ‘영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규정된,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삶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존재가 원하는 것, 그것에 기준을 두라고 한다. 세상이라는 물결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당당히 일어서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를 권한다. 모두에게 인생이란 단 한번뿐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줌의 소금을 만들기 위해 바닷물을 다 끓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길은 걸어서 만들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산길에 있는 오솔길도 사람이 많이 다니면 큰 길이 될 수 있지만, 큰 길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이동이 적게 되면 풀만 우거지게 된다. 첫 펭귄이 되어 행동을 하면 뒤에 있는 펭귄들은 모두 따라온다고 한다. 그러나 첫 펭귄은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 선구자는 누구나 외로운 것이고, 이단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시련과 역경을 거치면서 사람의 본성과 바탕이 외부로 표출된다. 좌절의 시간에 그저 주저앉아 포기하고 마는 사람과 그 시간을 자기 발전의 토대로 삼는 사람이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고, 누구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장 깊은 마음의 내면 속에 감추어두고 있다.

말이 달라지면 생각의 길이 달라진다. 생각의 길이 달라지면 인생의 길도 달라진다. 따라서 생각의 길(思路)을 닦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사람에게 내재하는 생체에너지는 마치 분필과 같이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많이 쓰면 쓸수록 일찍 소모 되는 법이다. 평생의 공부를 통하여 내공으로 축적된 마음의 힘이 있느냐에 따라 인생의 후반기에 큰 변화와 차이가 발생한다. 사람이 출생한 이후 하루하루의 모든 총합이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밤하늘에 보이는 북극성을 삶의 이정표로 삼고 중간 점검을 해가면서 자신의 꿈, 이상과 비전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도만 따라가서는 안 되고, 나침반을 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자신을 반성하는 채찍이 되고, 정신을 일깨우는 죽비가 될 것이다.

단테가 필생의 작업으로 완성하려고 노력하였던 신곡과 같이, 죽어 만만히 없어지지 않을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숨을 쉬는 동안 존재의 다른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준 시간과 공간에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사 이치를 조금씩 곱씹는 연말을 보내면서 천명(天命)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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