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이익성譯, 을유문화사刊])’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 ‘살만한 곳(卜居之地)’의 몇 가지 조건을 따졌는데, 그 중 하나가 ‘생리(生利)’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람과 이슬을 음식 대신으로 삼지 못하고, 깃(羽)과 털(毛)로써 몸을 가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히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人生於世旣不能吸風飮露衣羽蔽毛則不得不從事於衣食).”

그 까닭에 ‘생리’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생리’라 함은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 즉 ‘물산’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풍으로 말한다면 ‘생계의 방도’ 또는 ‘생활방위(生活防衛)’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게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제일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故上沃爲上舟車人物都會可以貿遷有無者次之) .”

그러면 변호사가 ‘살만한 땅’은 어디일까. 그곳은 단연 ‘공공’이다. 나 이외에 남(他者)을 인정하고 그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그것은 결국 ‘시민의 바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는 시민의 바다에 들어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민의 바다에 들어가는 데는 입장권이 필요하고 집을 짓는 데는 건축허가가 필요하다. 누가 뭐래도 변호사로서의 유용성(有用性)이 그 입장권이고 건축허가다.

그런데 변호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변호사와 공공 즉 시민의 바다 사이에는 큰 장벽(障壁)이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는데 다만 변호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 그것은 물론 변호사가 만든 것이다. 그 장벽을 헐어야 한다. 그 장벽을 허물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다. 공공도 유용성도 다 소용이 없다.

그 장벽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심리(心理)의 벽이다.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우월감, 엘리트 의식을 말한다. 변호사는 그 벽으로 세상과 자신을 갈라놓고 있다. 엘리트 의식이라는 것은 이미 현실과 괴리된 부유물임을 모르고 있다. 지금 그 부유물이 변호사를 역사의 패자(敗者)로 만들어 가고 있는데도.

다음은, 비용(費用)의 벽이다. 변호사 스스로 높은 비용의 벽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우월감과 자존심을 만끽하려 든다. 세상과 자신을 그것으로 구분하려는 것이다.

셋째가 폐쇄(閉鎖)의 벽이다. 업무의 폐쇄성 즉 미지의 고객으로부터의 사건 수임이나 동업자 또는 유사 업종과의 업무 협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그 장벽은 왜 생겼는가. 그것은 변호사의 실용적 욕망 즉 현실에서 유복하고 영향력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욕망은 상호 모방적이다. 나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을 결정하고 타자의 욕망은 내 욕망을 결정하는 욕망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졌다. 장벽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는 그 장벽에 갇혀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진 것을 모르고 있다.

이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 일에 모든 변호사가 다 함께 힘을 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 모든 변호사가 활단층(活斷層)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활단층위에 있지 않은 변호사는 자신이 그 위에 있지 않은 것이 행운을 초월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서 지진의 공포에 떨고 있는 변호사를 경멸하고 있다. 그것은 능력이 아닌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데도 그 우연으로 인해 안일(安逸)과 견실(堅實)을 혼동하는 아둔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연이라는 기회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은 가장 무지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변호사는 이제 스스로가 쌓아 놓은 장벽을 허물고 세상에 나와야 한다. 그리고 멀리 보아야 한다. 지금 변호사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스스로의 패배와 파멸을 건 모험적 전법(戰法)을 구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전적이고 비약적인 사고만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런 도전과 비약에의 공포심에서는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뛰어난 사수(射手)는, 맞추어야 할 표적이 멀리 있어 자신의 활과 화살의 능력의 한계를 자각할 때 그 표적보다도 훨씬 높은 곳을 노린다. 그것은 화살이 높은 곳에 도달하도록 하려 함이 아니라 화살이 보다 멀리 날아가 표적에 미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의 한 귀절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변호사가 ‘살만한 땅’이 어디인지 짐작이 갈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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