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신문은 종이신문이 아니라 인터넷신문이 대세인 듯 하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시민들은 떼를 지어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취득한다. 지하철 무가지가 활황인 때가 엊그제 같다. 그런데 인터넷신문의 활성화로 우리가 더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대신문까지 어뷰징 기사를 싣는 것은 정말 새로운 공해이다. 현재 어뷰징 기사는 단지 인터넷신문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중앙, 동아일보와 같은 대형신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중소 규모 신문사들의 어뷰징 기사는 이미 도를 넘어선 상황이다.

어뷰징 기사에 더하여 표절 기사도 한 몫을 한다. 인터넷 환경에 발빠르게 대처한 것이 표절 기사이다. 기자가 반드시 현장에 가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란다. 그렇기 때문에 책상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기사를 쓸 수 있다고 강변하고 실제로 만들어 내는 것은 표절 기사이다. 신문기사의 표절은 지극히 관대한 듯 하다. 일부 인터넷신문들은 열악한 취재환경 및 경제적 사정을 이유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표절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기자가 직접 외국에 나가서 취재를 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외국 기사를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표절과 어뷰징이 뒤섞인 기사가 우리 언론의 현실이며, 언론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인터넷신문이 내보내는 광고를 보면, 그 선정성은 너무 지나쳐 아이들과 함께 인터넷을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또한 기사를 가장한 광고도 새로운 공해이다. 자세히 내용까지 읽어보지 않고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기사인지 광고인지 광고성 기사인지 협찬 기사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인터넷신문의 재정적 상황이 열악하다고 하더라도 독자에게 오도된 정보를 알리거나 광고임을 알리지 않고 광고행위를 하는 것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우리의 바람직한 인터넷 언론환경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신문 기사의 내용이 어떠하든, 정확한 정보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어뷰징 기사, 표절 기사, 선정성 광고와 기사 및 광고성 기사 등을 규제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 법적으로 규제를 할 수 있는 것은 법률적으로 규제를 하고 자율적으로 규제를 하여야 하는 부분은 자율적인 규제를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지나친 방임은 언론 전체의 공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문 기사나 광고를 법적으로만 규제할 수 없다. 언론인과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언론인들의 자율적 자정능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진시민사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성숙한 시민의식과 이에 기한 자율적인 조절능력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역사가 짧고, 시민참여 민주주의의 시간은 더 짧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관치시대를 살아왔고, 그러한 관치가 더 익숙한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치로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 수 없다. 시민사회의 노력만으로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 수 없는 것은 맞다. 국가의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의 규제나 지원만으로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 수 없다. 시민이 어떠한 신문을 볼 것인가의 문제는 순전히 사인과 사인의 관계로서 자율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우리사회는 자율적인 합의를 이루는 시민사회의 능력이 없다. 매일 쓰레기 같은 신문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자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능력도 없다. 그저 내가 자본을 축적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경쟁은 최선의 덕목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불공정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시민사회가 억제하고 방어하는 수단은 없다. 잘못된 제도로 소수의 사람이 부당하게 자본을 축적하는 것에 대한 자율적인 규제도 없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인터넷신문이 페이지뷰를 높이기 위해서 무슨 수단인들 쓰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당장 페이지뷰를 높이는 것은 신문사의 수익으로 연결되고 매달의 활동비나 급여로 배당된다. 그러나 이는 언론의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언론이 단지 사기업이라고 한다면, 언론에게 취재의 자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언론에게도 적용되며, 우리는 이를 자율적으로 개혁하지 못한다.

새로운 관치가 등장하고 있는 시기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3세가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을 때,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 3세에 열광하였다. 그의 관치에 프랑스 국민은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결국 보불전쟁으로 프로이센에 항복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보나파르트 3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좀 더 자율적인 사회 변혁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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