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일단 궁궐로 달려가고 보던 것은 우리 백성들의 오래된 버릇이다. 물론 예전에도 마음대로 궐 안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하소연하려는 이들은 후원 담 밖에서 임금의 행차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가의 행렬이 나타나면, 임금이 자신을 보게 하려고 대뜸 징이며 꽹과리를 시끄럽게 울려댔다. 그래서 이 민원행위를 ‘격쟁(擊錚)’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판례집인 심리록(審理錄)에 특히 격쟁의 기록이 많다.

어떤 정병(正兵)은 숫제 창덕궁 단봉문 너머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밤새도록 꽹과리를 쳤다. 창경궁 함춘원의 뒷담을 넘어 들어온 사람도, 드물게는 임금의 수레 바로 옆까지 뛰어 들어온 이도 있었다. 궁중에서 밥짓는 일을 하는 반공(飯工)이 경회루 근처에서 격쟁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밥상을 받은 충의위(忠義衛)가 “음식이 적다”며 마구 때린 까닭이었는데, 소상한 사정을 들은 임금은 그를 파직시켰다.

음식투정이 파직으로 이어진 충의위의 사례만 놓고 보면 임금에게 별 사소한 고자질을 다 한다 싶다. 하지만 임금 앞에서 꽹과리를 치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소란을 피운 대가로 곤장부터 맞고 발언권을 얻는 이가 태반이었다. 폐단을 끊자며 “허실을 막론하고 장 80대를 때리자”는 과격한 건의도 이뤄졌다. 단봉문 나무에 올랐던 정병은 아침까지 안 내려오다 장 100대를 맞고 변방 고을의 노비가 됐다.

그나마 간혹 있던 성공담이 퍼진 탓에 억울한 이들은 먹을 것까지 싸들고 궐 주위로 향했다. 세조 때에는 행궁 가까운 땅을 찾아 목 놓아 우는 백성이 유독 많았다고 실록에 쓰여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상경 투쟁인 셈이다. 밤마다 통곡 소리에 시달린 세조가 결국 방을 붙이기에 이른다. “억울함을 고하려면 남문을 나와 의금부에 먼저 말해라. 밤에 곡성(哭聲)이 어소(御所)에 통한 자는 명나라 법에 따라 다스린다.”

이때 명나라 법이란 임금의 행차에 함부로 끼어든 군민을 조치하는 대명률(大明律) 법조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울음소리가 넘어와 부딪혀도 내 몸을 건드린 격이라고, 세조는 엄숙히 선언했다. 서슬 푸른 법치(法治)가 과연 성과를 거뒀을까? 원한이 깊은 백성들은 엄포에도 좀체 물러가지 않고 계속 울었다. 뒷날 무명의 사관이 이날 어명의 효과를 4글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였다(然猶不止).”

“가자, 청와대로!” 기어이 궁궐에 가까이 가려는 염원은 물려받은 한(恨)일 것이다. 집회 참여자들조차 배척하는 일부의 폭력행위는, 제발 나를 봐 달라는 꽹과리질이 엉뚱하게 자란 결과다. 삐뚤어진 원한 속엔 예나 지금이나 조금씩 오해가 섞여 있다. 실컷 떠들곤 관청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나무에 숨어버리는 시위자가 있는 것도, 소란의 끝엔 애꿎은 수문장(守門將)이 먼저 치죄당하는 것도, 모두가 반복되는 역사일 테다.

그런가 하면, 법치의 선언만으로는 통곡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는 장면도 분명 눈여겨 볼 대목이다. 집회의 권리를 행사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정부가 국민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식이 해마다 큰 폭으로 커지고 있다. 토요일에 왜 그리 많은 노동자와 빈민이 길거리에 모였을지, 그 연유를 한번만 살펴달라는 절규가 총궐기 이후 회자됐었다.

우리가 왜 거리에 나와 있겠는가… 이 부르짖음에 이미 응답한 임금이 역사 속에 있다. “야밤에 궁궐 주변에서 시끄럽게 울지 말라”는 세조의 어명 바로 이듬해에 즉위한 성종이다. 그는 할아버지와 사뭇 달리 의정부에 이런 전지(傳旨)를 내렸다. “끓는 물을 저어서 끓어오르지 않게 하려는 것보다는, 불을 지피는 나무를 없애는 게 낫다. 그림자를 두려워해 달아나는 것은, 그늘에 있는 것만 못하다.” 무슨 비유인가?

매 맞기를 무릅쓰고서도 왜들 끊임없이 어가에 뛰어들어 꽹과리를 울리겠느냐고, 성종은 자문한다.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건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다. 억울함을 없애지 못하고 소송이 없게 하려면 되겠는가?” 성종은 격쟁의 원인이 백성에 앞서 나라에 있다고 돌아봤다. 백성의 애끓는 마음이란 임금과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고, 요행으론 절대 식히거나 떼어낼 수 없는 법이라고, 그는 500년 전에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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