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노동개악 반대, 농산물 가격보장, 농민 생존권 쟁취, 청년실업 대책 마련 빈민·장애인 생존권 쟁취, 성소수자들의 외침,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등등. 이것들이 다 무엇인고 하니 지난 2015년 11월 14일 있었던 이른바 광화문 시위에서의 슬로건들이다. 참 다종다양하고 우리 사회 각계의 문제와 고충들을 총망라하고 있어 오히려 어느 것 하나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선명하지 않은 그들의 메시지는 국민에게 전달이 되지 않고 ‘현 정권 심판 내지 퇴진’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하고 진부한 슬로건으로 뭉뚱그려졌고, 집회와 시위의 폭력성과 위법성 논란만으로 온 나라를 들끓게 하는데 그쳤다.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인가, 아니면 시위대의 폭력적인 시위행태가 문제인가? 조계종은 화쟁의 전통을 살려 시위를 주도한 노조위원장을 비호해 주어야 하나, 아니면 수배자 은닉이라는 범법행위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해야 하나? 뭐 이런 논쟁 속에 그들이 왜 집회와 시위를 했는지, 그들이 바라고 주장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실패한 시위다. 집회와 시위를 왜 하는가? 국민 여론을 자신들의 주장에로 집중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국민의 눈과 귀는 그들이 힘겹게 저 먼 시골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서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어떤 간절함과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한 것인지에 기울여지지 않았다.

오직 왜 시위대들이 경찰차에 밧줄을 묶어 끌고 다니는지, 왜 경찰차 유리창을 쇠파이프로 깨부수는지에 대해서만 오롯이 집중되었다. 사실 시위대가 주장하고 외친 슬로건들은 우리 사회에 시급한 현안들이고 현 정부나 지도층이 나서서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인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 대해 좀 더 조명하고 분석해주지 않은 언론의 보도 행태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언론의 보도행태만을 탓할 일인지는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한 책임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젠 야당대표까지 나서 간디의 평화주의를 운운하며 폭력시위는 안 된다고 말리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 이 문제의 핵심을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좁은 시각에서 접근하면 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간디가 1세기 전에 영국식민통치하의 인도 땅에서 최선의 방법이라 선택했던 비폭력 불복종이 2015년 대한민국의 오늘에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디의 위대한 정신에서는 힌트를 얻어야 하겠다. 간디는 자신을 옭아매는 부당함에 맞서서 진정 위대한 영혼의 성찰로 그 부당함에 맞설 방법을 고민했다.

간디가 제시한 방법을 소극적이라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대 인도땅에서의 모든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 간디가 제시한 해법에는 때로는 희생도 따랐지만 식민통치를 하는 영국의 지배자들의 명분을 무색케 하고 결국 3억 인도인들이 원하는 목적을 쟁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간디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신에게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는 식민지 출신 젊은 학생을 아니꼽게 여기던 피터스라는 교수가 있었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피터스 교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경우란 없다네.” 그러자, 간디는 “아! 걱정 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 갈께요”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간디가 피터스 교수에게 맞서, “돼지에게도 새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돼지와 새는 평등합니다”라고 하며 화난 얼굴로 피터스 교수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그 모습 위로 2015년 대한민국 시위대의 모습이 겹쳐진다.

예컨대, 필자가 생각하는 창조적 시위방법은 이런 거다. 만약 폭력시위자에게 물감총을 쏘아 검거하겠다고 하는 경찰의 시위진압방법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시위 참가자 모두가 비슷한 물감총을 구해서 서로에게 물감총을 쏘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행진하는 거다.

필자는 최근의 광화문 시위나 특정 시위의 정당성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사회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분명 2015 대한민국 시위대에겐 상상력이 더 충전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 더 이상 모난 돌이 정 맞는 시대가 아니라, 모난 돌의 개성과 독창성이 귀하게 쓰임을 받는 시대를 꿈꾸며. 창조경제시대에 걸맞은 창조적 시위문화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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