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떤 한계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알 수 없는 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 그가 나를 비롯하여 나의 주위 사정을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일이다. 제주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인데 처음으로 자동차운전을 배워서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고 다닐 때 일이다. 가족과 함께 북제주의 함덕해수욕장에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하며 놀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귀가하고자 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다른 일행과 함께 웅성웅성 둘러서서 얘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에 나는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에 다가가 이를 빼내어 가족을 태우고 귀가할 참이었다. 

포니1 자동차였는데 후진하여 빼낼 참이었으므로 운전석에 앉기 전에 용의주도하게 직접 다가가서 자동차의 뒤쪽을 잘 살펴서 아무런 장애물이 없음을 눈으로 확인한 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후진기어를 넣은 후 몸을 돌려 뒤쪽을 살피면서 가속페달을 밟았으나 차가 덜커덕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지를 않았다. 몇 번 더 되풀이하여 시도해 보았으나 여전하므로 ‘아마도 뒷바퀴 밑에 뭔가 돌멩이라도 걸려서 그런가 보다’하고 짐작한 나머지 운전석에서 내려와 뒷바퀴 밑을 살피러 뒤쪽으로 가보게 되었다.

뒤쪽으로 가봤더니… 아이고, 하느님 맙소사! 우째 이런 일이! 모골이 송연해질 일이 그곳에 벌어져 있었다. 첫돌을 지났을까 말까 하는 정도의 어린 아기가 혼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차의 뒷범퍼 바로 아래에서….막상 바퀴 밑에는 돌멩이든 뭐든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일행들은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여전히 얘기꽃을 피우는 데에 열중하여 있었고. 사전에 확인한 대로 안전하리라고 믿고 무심코 자동차를 후진시켰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왜 내 차가 덜커덕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럴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초보운전이라 미숙하기는 하였지만 후진조차 못할 정도로 미숙한 것은 아니었는데…. 돌멩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내 차의 후진을 막고 있었을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로 가족을 태운 후 멀쩡하게 운전하여 귀가하였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말해도 웃어넘기고 믿지 않을 테니. 지금도 가끔씩 혼자서만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상할 뿐이다. 그때 누가 나와 내 차를 지배하고 조종하여 큰 사고를 막아 주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른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일은 아니겠지만, 어떤 일에 당하여 끝까지 내 힘과 뜻으로 관철하려고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만한 일만 찾아서 알뜰하게 다한 후 그 다음은 누군가 알 수 없는 힘이 조종하는 대로 맡겨두는 것도 훌륭하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흘러가는 물 위에 작은 배를 띄우면 그 물길을 따라 배가 떠나가듯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피고인이 집행유예결격자이고 자백하는 형사사건의 항소심을 맡은 적이 있다. 벌금형이라도 선고받을 수 있으려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애를 써봤으나 결국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게 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던 사건이었다. 떠밀리듯 상고장을 제출한 후 마땅한 상고이유를 찾기 어려운 나머지 상고이유서 쓸 걱정으로 망연해 있는데 피고인의 가족들이 보석청구를 해달라고 조른다. 이미 실형이 선고되었고 상고이유도 마땅찮은 상고심밖에는 남지 않은 마당에 보석허가가 나올 리 없다고 잘라 말했으나 막무가내로 간청하므로 할 수 없이 가족들의 애절한 탄원서를 첨부하여 보석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덜컥 보석허가가 나왔다. 석방된 피고인의 표정이 밝고, 보석허가를 받아준 변호인에게 감사하단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 흘러가는 물길이 그렇게 유도한 것이고,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어 그가 그렇게 조종한 것이다. 내가 쉽게 재단하거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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