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한적한 마을, 코뿔소 한 마리가 거리 한복판을 뛰어 지나갔다. 물건도 부순다. 본 사람도 있고 못 본 사람도 있다. 한번의 해프닝은 ‘해외토픽’에나 나올만한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 코뿔소로 변해있었다. 당장 내 일은 아니지만 약간의 우려가 생긴다. 우리 마을에 이런 일이 왜 생기지? 며칠이 지나면서 코뿔소로 변한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된다. 그런데 코뿔소들은 이런 위협을 스스로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걱정은 오로지 사람으로 남아 살아가는 자들의 몫이 된다. 나를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코뿔소가 된다. 이제는 나만 이상한 것일까? 나는 계속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위의 단 몇 줄이 프랑스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1909~1994)의 ‘코뿔소’의 줄거리이다. 그렇다면 긴 연극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연극으로 보든 희곡으로 읽든 위 줄거리 이외의 내용들은 무의미하다. 코뿔소의 뿔이 몇 개인지, 지금까지 몇 마리를 보았는지, 무엇을 먹는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 엄습해오는 공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 공포에 굴복할지 말지,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인지 남들과 같이 코뿔소가 될 것인지는 주인공 베랑제의 마지막 대사에 울릴 뿐이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을 두고 ‘부조리극’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삶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는 것인데, 이는 극작가의 연극적 형식을 두고 하는 얘기이기도 하고 내용을 두고 내놓는 평이기도 하다. 코뿔소가 어디에서 건너온 것인지, 뿔이 몇 개인지 열띤 논쟁이 이어진다. 연극을 따라가보면 그럴듯한 얘기들 속에 빠진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들은 줄거리에 방해가 되는 장광설에 불과하다. 언어유희에 놀아나는 것이다. 본질은 코뿔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코뿔소가 되었는지, 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인지 말지가 핵심이다. 그런데 연극은 형식에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본질은 놓치고 비논리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진 연극을 따라가게 만든다.

이 작품을 수작으로 꼽는 이유는 연극의 막이 내리고 귓전에 남은 비논리적인 논쟁들과 머리 속에 울리는 외로운 인간의 절규 사이의 부조리함 때문이다. 이오네스코는 코뿔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 연극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고 몰두하고 싸우는지, 그리고 그러는 사이 사람이 얼마나 사나운 코뿔소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코뿔소는 무엇인가? 작품이 쓰여지고 상연된 시기를 염두에 두고 보면 나치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초연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바래지 않는 것은 코뿔소가 가지는 보편적인 ‘악마성’ 또는 ‘비인간성’과 내재된 전염성 짙은 ‘광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15년, 21세기가 시작하고도 무려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연극을 소개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유가 무엇일까?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면서도 복면을 쓰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이 연극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국정교과서를 거부하면 좌편향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이 연극하고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증거자료가 편중된 사안에서 법원이 오히려 점점 더 엄격한 입증책임을 부과하는 경향과도 이 연극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검찰의 고위공직자에 대한 납득하기 어려운 불기소처분도, 국회의원이 자기 자식을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가는 것도 이 연극하고 일말의 관련성도 없다. 변호사가 브로커를 돌리면서 시장을 유린하는 것 역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연극이 끝나도록 코뿔소가 되지 못한 베랑제는 사실 난세의 영웅이 아니라 동네 카페에서 이따금 커피를 마시는 소시민이다. 그래서 그를 두고 ‘소영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통상의 영웅과 달리 소시민 베랑제에게는 코뿔소로 가득차는 세상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 그저 남들과 달리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차이가 베랑제가 느끼는 모든 공포의 근원이기도 하다. 차라리 코뿔소가 되고 싶다는 그의 자조가 가지는 울림이 큰 이유다.

남들처럼 코뿔소가 되었다면 베랑제의 연극도 일찍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코뿔소로 변하는 전염병은 없다. 외적 상황에 굴복해 인간성을 잃어가는 순간 사람은 코뿔소가 되는 것이다. 외적 상황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연극 코뿔소와 관련 없다고 열거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외적 상황이 된다. 그러한 부조리한 상황 안에서 저항하지 않을 때, 부조리함에 휩쓸려 나도 한 마리 코뿔소가 되는 것이 아닐까.

연극을 소개하는 글 하나 쓰기에도 왠지 불편함이 느껴진다. 우리 세상에 늘어가는 코뿔소의 수만큼 버텨내는 베랑제도 많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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