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지하생활자의 수기(문예출판사, 1987)’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첫 문장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가 아니라 그의 편지에서 먼저 알았다. 그는 머리가 좋았던지 짧은 기간의 전력질주로 학력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얼떨결에 법대로 온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단순해서 회의를 품을 줄 모르던 내가 법대에서 따라가려 안간힘을 쓸 때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내달리는 법대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했다. 얼마 안 가 그의 모습은 강의실에도 도서관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가 짱돌이나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법서를 끼고 강의실과 도서관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오갈 때 그는 골방에서 괴테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답장 없는 편지를 휘갈겨 쓰곤 하였다.

게다가 그는 혼자서 가망 없는 사랑의 열병을 오랫동안 심하게 앓기도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보기에 그녀는 그에게 구원의 베아트리체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의 열정과 재능은 제 길을 찾지 못하고 아무도 그를 끌어내 주지 못하는 지하 어두컴컴한 곳에서 퇴색해 갔으며, 찬란하게 빛나야 할 그의 젊음도 점차 시들어 갔다. 그는 크고 멋진 날개를 고이 접은 채 고개를 날개 사이로 힘없이 떨구고 옹색하게 웅크리고 앉은 독수리를 연상시켰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그가 편지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인용했을 때 그것은 자기고백이기도 하였는데 나는 이보다 더 그를 적확하게 묘사할 만한 표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기껏해야 참새 정도의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보겠다고 애를 쓰는데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도 골방에 틀어박혀 사는 그를 마땅히 병적인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이 짧고 단순한 문장을 병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였다. 사람들에게서 보는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든 난해하고 음험하고 불안정한 심리상태와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종류의 기이한 행동을 병적(病的)이라는 단 하나의 형용사로 모조리 포섭할 수 있는 듯이 여겼었다.

이제 와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우울감과 우울증이 서로 다른 것이듯 잠깐의 병적인 심리상태와 그것이 항상화(恒常化)된 병적 상태가 서로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를 일컬어 병적인 인간이라고 한 것은 사실 온당치 못한 진단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하지만 병과 병이 아닌 것, 병적인 것과 병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였고 젊은 날의 치기는 그 경계를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하게도 해주었다. 그랬기에 병적인 인간이라고 했다 해서 꼭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이면에는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찬미도 전혀 없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살 길을 찾아 뿔뿔이 세상으로 흩어지면서 풍문으로라도 그에 대한 소식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익명의 거대한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고 나도 소설의 첫 문장이 남긴 인상을 어느 틈엔가 잊어버렸다.

학교 밖으로 나오니 세상에는 정말로 병적이라 할만한 심리상태의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현대인의 삶은 사람들마다 병적인 심리상태가 일어나는 빈도나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시간의 길고 짧음, 전문가의 조력이 없이도 자기성찰로 치유나 회복이 가능한지 여부가 각기 다를 뿐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였다.

특히 소송이란 것이 신체에건 정신에건 물질에건 간에 무언가 상처를 입은 부분이 있어 이를 회복하려고 하는 일인데 이를 진행하는 자체가 다시 상처가 되기도 하는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하여 법원 주변에서는 소송으로 도리어 마음의 병을 얻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케케묵은 소송기록이 든 보따리를 들고 매일 법원주변을 맴돌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때로는 상대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사람들도 보았다.

오래 전 지하 골방에 스스로를 가둔 그가 그녀에게서 지상으로의 구원을 기대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듯이 그들도 헛되이 법조인에게서 마음의 병을 고쳐주기를 기대하는 건 아닐까 안타까웠다.

최근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예의 그 소설(민음사, 2010)을 새로 샀는데 제목이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붙어 있고 뜻밖에도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픈 사람이다.”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고 그저 단순하고 밋밋할 따름이었다. 번역 탓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이젠 병적인 인간도 아픈 사람도 다 싫고 그냥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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