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에서의 공판중심주의는 해마다 강화되는 것 같다. 4년 전만 해도 공소나 증거는 그 ‘요지’만 낭독하고 자백사건은 대부분 간이공판으로 해왔는데, 한두해 사이에 간이공판이 거의 없어지고 또 전문심리위원을 통한 심리도 활성화 되더니 급기야 올해부터는 증인신문은 그 조서를 남기는 방식이 아닌 녹취서가 증거 파악에 쓰이는 등 매년 그 변화가 새롭다. 이러한 변화는 궁극적으로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공판중심주의의 추세에 크게 역행하는 변화가 한 가지 있으니, 바로 사실조회의 무용화이다.

형사재판에서의 사실조회는 피고인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통신사에 조회하는 발신기지국 장소 및 통화사실 여부, 상해사건에서 진단서의 신빙성 여부를 살피기 위해 병원 담당의사에게 관련사항을 질의하는 조회내용 등 피해자나 참고인이 주장하는 내용이 객관적으로 사실인지 여부를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쓰였고, 또 문서작성자를 일일이 증인신문하지 않고 위 조회 방식으로 갈음함으로써 공판절차의 신속화를 돕는 역할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는 사설기관이 많아졌다. 특히 올해 초부터 3대 통신사가 모두 법원에 통신사실확인자료의 제공을 중단한다는 공문을 보낸 것이 가장 큰 타격이다. 서울고법에서 수사기관에 통신자료를 제공한 사실을 이용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통신사에 1인당 20만원에서 30만원 가량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그 계기가 된 듯하다. 규모가 제법 큰 병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병원 내 사내변호사 채용이 활성화되더니 최근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해 ‘의료법 제21조에 따라 환자의 자료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거절 답변을 보내오는 곳이 많아졌다.

사실 이러한 기관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없지 않다. 이전까지는 정보보유자들이 법원에 대한 일종의 ‘협조’로서 정보를 제공하였지만, 해당 정보가 판결의 결정적인 근거가 됨에 따라 ‘왜 내 정보를 함부로 제공하였느냐’는 민원인들의 문의가 빗발치게 되자, 고객의 이익이 최우선인 그들에게는 고객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요청이 법원에의 협조보다 더 큰 공익사유가 된 것이다.

이러한 큰 시스템의 변화 때문에 울상 짓는 것은 피고인들이다. 분명히 증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밝힐 객관적 자료 확보를 법원의 조회로 할 수 없다면 결국 피고인이 알아서 근거를 확보하라는 꼴이 된다. 형사재판을 전담하는 필자로서도 요새는 꽤 막막한 심정이 든다(가사재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불륜의 가장 큰 증거인 통화내역 확보가 되지 않으니…).

물론 현 제도 하에 사실조회를 강제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한번은 피고인이 밀어서 넘어지는 바람에 피해자의 척추가 손상되었다는 상해사건에 대해, 피고인은 완전히 누명을 쓴 것이라며 강력한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막상 피해자를 법정에서 증언해보아도 그 진술에 과장이 다소 섞인 느낌이 든 사건이 있었다. 게다가 피해자는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기왕증이 의심되었기에 진단서를 제출한 병원에 피해자가 이 사건 이전 진료 받은 기록부 일체를 요청했으나 병원에서는 위와 같이 의료법을 이유로 정보제공거부를 해왔다. 우리 측은 해당 자료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재판장님은 고심 끝에 해당 병원에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하셨다. 결국 그 사건은 확보된 자료들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없음 등을 토대로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영장 발부가 없었으면 피해자에게 골다공증이 존재하였다는 자료를 피고인이 확보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모든 사실조회는 법원에서의 압수수색영장 발부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그것은 매우 무리한 요구이다. 수사기관에서의 압수수색이야 대부분 피압수자에게 일정한 수인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뤄지지만, 법원에서는 피고인 측 요청에 의해 주로 피해자 측의 자료를 필요로 하는데, 범죄자도 아닌 기관들을 매번 압수수색의 대상으로 삼아 피해를 줄 수는 없는 것이고(특히 통신사에 압수수색영장을 통한 통신사실조회를 하게 되면 고객서비스팀은 아마 매일 전국 법원에 의해 수색당할 것이다) 피고인 입장에서도 막상 자료를 받아보기 전에는 그 자료의 유불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장발부를 강하게 요청하기는 어렵다.

결국은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형사소송법 제272조의 ‘공무소등에 대한 조회’ 규정은 법원이 공무소 또는 공사단체에 그 조회를 할 수 있다는 권한규정일 뿐 그 요청을 받은 기관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어서 위 규정만으로 사실조회를 살리기 어렵다. 기관의 개인정보보호를 엄격히 요구하고 있는 현 사회 속에서, 정보제공자를 보호할 규정도 두지 않고 무조건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판중심주의를 위한 실질적인 제도개선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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