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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기자실]그때 알고 있는 걸 지금도 알았더라면
이경원 국민일보 기자  |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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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호] 승인 2015.11.09  09: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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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4월, 예종의 명을 받든 승전환관 이존명이 봉상첨정 민수(閔粹)의 자택을 돌연 압수수색했다. 한번 제출한 사초(史草)를 몰래 빼내 고친 혐의였다. 집에서 종이를 태운 재가 발견됐고, 민수는 긴급체포돼 궁정으로 끌려왔다.

밀고를 접수한 영의정 한명회가 이미 “국사는 만세의 공론”이라며 국문(鞫問)을 촉구하고 있었다. 예종이 직접 묻고 민수가 조아려 답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이날에 전한다. “너의 사초를 고치고 삭제하였느냐?” “그렇습니다.” “고치고 지운 까닭을 모두 말하여라.” “양성지가 지금 춘추관에 근무하고 있어, 신(臣)이 두려워 고쳤습니다.”

문과(文科) 1등 출신 민수는 사관(史官)이 된 뒤 대신의 득실(得失)을 많이 썼다. 당시 검찰총장인 대사헌 양성지를 두고서도 거침없이 ‘구용(苟容·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춤)’이라 평했다. 그런데 세조실록을 펴내려 거둔 사초마다 사관의 ‘바이라인’을 남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급히 사초를 빼내 ‘구용’ 2글자를 지웠고, 그 밖의 인물평 5곳에 ‘톤다운’을 했다. 김국광이 “명성에 많이 집착했다”고 쓴 부분은 “오래 권좌에 있어 비방이 많았다”고 에둘렀다. 윤사흠을 기록한 문장은 ‘사주(使酒)’를 ‘기주(嗜酒)’로 1글자 고쳤다. “술기운에 기세를 부린다”는 표현이 “술을 즐긴다”는 것으로 순화됐다.

직필(直筆)은 어느 쪽이었을까. 국문 첫날, 민수는 ‘카더라’를 바로잡은 과정이었다고 강변했다. “전해들은 일[傳聞之事]을 기록했습니다… 옳지 못하다 여겨 고치고 지웠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동료 사관들이 잡혀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직필이었으나, 고치고 지운 것은 진실로 재상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정인지·정창손·김질… 그가 두려워했다는 재상 27명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기가 막힌 예종이 장(杖)을 때리라 명했다. “네가 대신의 일을 썼다 지웠으니, 반드시 대신에게 아부하려는 것이다.” “대신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을 뿐이며, 실제로 아부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후대의 역사도 민수가 겁 없이 썼던 애초 기록을 직필로 본다. 1507년 일기청은 “예종 때 민수 등이 권신의 일을 바르게 썼다(直書)가, 위세가 두려워 다시 지워버렸다”고 중종에게 고했다.

민수사옥(閔粹史獄)을 계기로 사초를 익명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됐다. “사필(史筆)을 잡은 자에게 먼저 제 이름을 쓰고 남의 선악을 적게 하면서 그것이 사실대로 되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1545년 예문관은 민수사옥 당시 임금 앞에서 익명 사초의 정당성을 부르짖은 배짱 있는 선비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상소를 읽은 인종은 앞으로 사관의 이름을 쓰지 말라고 전교한다.

자부심 높다는 저 사관들이 거듭해 한 요구가 “바이라인 빼주십시오”였다니, 이름을 걸고도 직필할 수 있어야 진정 배짱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신 안녕의 목적으로만 치부하기엔 사관들의 결기가 실록 곳곳에 묻어 있다. 세종이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려 하자 황희 등 모든 대신이 달려와 막았다. “후세가 그른 일을 옳게 꾸미면, 천년 후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연산군의 실록 열람을 한사코 막은 이세영은 국문을 받으면서도 “사법(史法)에 저촉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천하의 연산군도 “너희가 사사(史事)를 위해 말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용서한다”며 물러섰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편안히 앉아 민수와 이세영, 연산군의 말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어느 사관이 기어코 적어둔 덕분이다. 조상들은 출처불명을 무릅쓰고서라도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은 기록들을 물려주려 애썼다. 그것이 사화(史禍)를 피하면서도 곡필(曲筆)을 막는 방법이었다고 이해하면 과분할까.

민수의 일생 앞에서, 기사를 여러 번 고치는 나 같은 기자(記者)는 옷깃을 여며야 할 것이다. 위악적으로 곡필을 토로한 그는 의금부 하옥을 앞두고 자결하려다 아내가 말려 그만뒀다. 실록의 다른 부분에 그가 제주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주석으로 남아 있다.

세초(洗草)한 종이를 다시 쓰던 그때에 비하면 종이든 기록이든 넘쳐나는 세상이다. 하지만 춘추관이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일터로 전승됐듯, 무섭게 되풀이되는 역사가 있다. 전해들은 일을 적으면 문제가 되고, 궁중의 기록을 빼내면 소동이 인다. 국사가 만세의 공론이란 얘기는 지금 대신들도 하고, 아버지의 인물평을 읽어보고 싶어 하긴 지금의 임금도 마찬가지다.

“만일 한 사람이 사정(私情)에 따라 쓰면 천만세를 지난들 능히 고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2015년에 어느 정치인이 한 말이 아니고, 1452년에 정인지, 황보인, 김종서, 허후, 김조, 이계전, 정창손, 신석조, 최항 등 9명이 세종실록을 쓰다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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