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넘어서서 일상처럼 친숙해지는 것들이 있다.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 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승강을 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소.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같은 노래가 그렇다. 옛 노래에 그다지 관심 없는 젊은이들도 멜로디는 알아보고 키득거리는 이 노래가 한국인들의 귀에 울리기 시작한 건 1936년이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미국에서 불리던 이 노래를 번안하여 내놓은 건 우리가 익히 아는 스타 최민수의 외할아버지 강홍식이었다(이 강홍식의 딸이 최민수의 어머니이자 최무룡의 부인 강효실). 강홍식은 전쟁 중 북으로 올라가 수용소에서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는 전언이 있는데 이 ‘서울 구경’은 강홍식이 한참 잘나가던 시절 내놓았던 히트곡 중의 하나였다.

원래 월북자들의 노래는 대개 금지곡이 되고 분단의 철창 아래 파묻히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이 ‘서울 구경’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남한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되니 그 주역이 바로 살살이 서영춘이었다. 예능의 끼가 넘치는 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그의 데뷔는 좀 우연찮게 이뤄졌다. 그는 원래 극장 간판을 그리는 화공이었다. 그런데 희극 배우가 펑크를 내자 대타로 투입됐고 거기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냄으로써 진로를 바꾸게 된다.

왕년에 그리고 아마도 지금도 툭하면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 머리를 톡톡 치면서 주는 핀잔일 “배워서 남주나?”는 그가 만든 유행어였고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 없으면 못 마셔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지기지기잔짠 쿵잔짠. 영변의 약산 진달래 마구마구 밟지 말고 돌아가세요”도 그의 ‘랩(?)’이었다. “요건 몰랐지? 가갈갈갈갈…” 하던 모습도 그렇다. 특히 앞서 언급한 서울 구경을 부를 때 ‘으하하하하 우습다 으하하하 우습다’ 하고 뒤집어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대목에서는 배꼽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특히 그는 애드립의 천재였으며 변화무쌍한 얼굴 표정으로 사람들의 웃음보를 터뜨리는 터라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전유성, 최양락 등 서서히 원로가 돼 가는 한국 코미디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꼽는 이라고 하니 알만할 것이다.

콤비를 이루던 뚱보 백금녀에게 덥석 안기기도 했던 그는 슬랩 스틱 코미디, 즉 때리고 넘어지고 등등의 연기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그건 항상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다고 한다. 녹화장에 가장 먼저 나왔고 넘어지는 각도와 관객의 시선을 연구했고 그가 넘어지면 유달리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토록 유쾌하게 관객을 웃겼지만 일상에서 그는 무척이나 엄했다고 한다. 손아랫 동생이 그 앞에서 무릎을 펴고 앉지를 못했을 정도였고 후배들에게도 즐겨 불호령을 내리는 선배였다. 그리고 정홍택 기자의 한국일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코너에서 서영춘은 독서량에서 기자를 압도하는 진귀한 코미디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한다.

원래 술 담배를 전혀 못했는데 두살 위였던 구봉서가 그만 방탕한 삶으로 인도(?)하여 엄청난 애주가가 됐다고 한다. 되레 구봉서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술·담배를 끊고는 서영춘에게 금연 금주를 권했는데 “형님이 권해 놓고 이게 무슨 소리요?”라고 왈칵했다는 전설이 있다. 공연 전에도 긴장을 풀기 위해 한잔 술을 홀짝거리고 마시던 애주가 서영춘은 1987년 11월 1일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 투병 생활 도중 한 후배가 면회를 왔다. 서영춘이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하자 후배는 요즘 우리가 통상 하는 말버릇대로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병석의 서영춘은 통렬하게 일갈한다. “이놈아, 나는 살지 못해 죽는다 이놈아.” 흡사 선문답같은, 그러나 선문답처럼 어렵지는 않은, 우리들의 삶을 관통하고 헤집는 가운데 정수리를 콕 짚고 넘어가는 문답이 아닌가.

어느 학교엔가 서영춘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제막식에서 동료 송해는 서영춘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 영춘이! 그대가 외쳤던 말,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사회를 향한 통렬한 질타였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예언이 되는 교훈이었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 백반, 없던 시절에 아무 것이나 잘먹자는 소리였으이, 뿐인가? ‘살살이…’, ‘요건 몰랐을거다’, ‘배워서 남주나’ 이 말은 면학을 장려한 말이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없이는 못마십니다’ 이 말 또한 가진 것을 잘 활용하라는 일침 아니었나?” 아마도 서영춘씨는 이 말을 들으며 빙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알았어? 갈갈갈갈.”

돌이켜 보면 그는 요령부득의 ‘랩’을 듣는 사람들이 기가 질려 배꼽 잡고 쓰러질 때까지 늘어놓을 줄 알았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차이코프시키 동생 두리스 위스키 작곡 시장조 도로또 4분에 4박자…산에 가야 범을 잡구 물에 가야 고길잡구…”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는 너무 빨리 잦아들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