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합니다, 경계가 사라진 세상을. 눈을 감고 상상으로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떠올려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생명의 기운(창조의 기운)은 강하게 느껴집니다.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상태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상상으로 하늘과 땅을 만들고, 산과 바다를 만들고, 도시와 농촌을 만들고, 그 속에 들짐승, 날짐승, 물짐승, 사람들을 만듭니다. 단, 각각의 형상들을 경계가 없는 투명한 모습으로 만듭니다. 경계가 없도록 개체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가는 실선으로 테두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테두리는 언제든 쉽게 사라지는 소재로 된 것이라고 합시다. 경계가 없는 각각의 형상들은, 자기 고유의 모습을 나타내는 듯 하다가도 쉬이 다른 형상들과 섞기기도 하고 겹치기도 합니다. 각각의 형상들은 똑같은 성질의 것이라 서로 섞이거나 겹치더라도 아무런 거부반응이 없습니다.

눈을 뜨고 마주하는 내 앞의 세상이, 조금 전에 상상했던 경계가 없는 세상, 만물이 투명한 모습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저기 멀리 보이는 하늘도, 구름도, 산도, 바로 앞에 있는 나무도, 컴퓨터도, 책상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편의상 물질의 형태를 달리하기는 했으나 속성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나와 나를 둘러싼 물질들의 경계를 허물어 보는 일은 일종의 놀이 같이 재미있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르네 마그리트의 어떤 작품(중절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 속으로 멀리 하늘과 구름이 보입니다)을 보고는 ‘앗 저분도 투명인간 놀이를 하셨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깊이 있게 작가의 세계를 탐구하지는 않아서 작품의 의도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상상으로 자신만의 깨달음을 찾아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없애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와 나를 둘러싼 사물과의 경계를 허무는 일보다는 좀 어렵습니다만(그 타인이 싫어하는 사람이면 지독하게도 어렵습니다), 방법은 같습니다. 나와 타인을 구분했던 실선이 무너지면서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없어지면, 나에게 베풀었던 관대함이 타인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나에게 베풀었던 사랑이 타인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선물을 했을 때의 기쁨과 타인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선물을 했을 때의 기쁨이 같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떠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말이 “너는 남들에게 주는 것을 너 자신에게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톡의 상태글로도 올려놓고 명심 또 명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남 앞에 등불을 밝히면 자기 앞도 밝아진다”고 하셨지요. ‘남을 위하는 일이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는 사자성어 ‘위타위기(爲他爲己)’도 모두 같은 깨달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생존과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일상에서 이런 깨달음을 떠올리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떠올렸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에 따른 선택을 하기란 더욱 쉽지 않고요. 그래도 나와 타인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상상은 깨달음에 따른 선택을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하느라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수험생 시절,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는 내게 희망사항으로 다가왔습니다. ‘아, 차라리 내가 지금 매트릭스 안에 있는 거였으면…. 시험에 합격하고 안 하고는 한낱 매트릭스(프로그램된 허상의 세계) 안의 허상에 불과한데, 뭐 그리 집착하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현실부정의 심리에서 영화의 내용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던 것이지요.

사십대의 중반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요즘 욕심내지 않고 그럭저럭 만족하며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문득 문득 눈앞의 세상이 매트릭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내가 ‘나’로서 살아 있는 시간은 길어야 100년인데, 100년의 삶 이전의 ‘나’와 100년의 삶 이후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한다면, 지금의 ‘나’와 100년의 삶 이전의 ‘나’, 100년의 삶 이후의 ‘나’는 모두 같은 ‘나’이지 않을까. 이런 ‘나’들이 지금의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100년간의 매트릭스 생활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지요.

틈틈이 상상합니다, 경계가 사라진 세상을. 눈을 감고 상상으로 들짐승, 날짐승, 물짐승, 사람들을 지우고, 도시와 농촌을 지우고, 산과 바다를 지우고, 하늘과 땅을 지웁니다. 경계가 사라진 세상, 경계가 사라지는 상상, 재미있고 즐거운 체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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