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대(紐帶)’라고 부른다. 유(紐)는 ‘끈’을 말하는 것이고 대(帶)는 ‘띠’를 말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것. 따라서 ‘유대’라는 말의 뜻은, ‘끈이나 띠로 묶듯이 서로를 결합시키는 것’ 또는 ‘두개의 것을 묶어서 연결을 맺게 하는 중요한 조건(혈연, 지연, 학연, 이해 따위)’이라고 설명하면 틀림이 없을 터. 요컨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어주고 혹은 유지하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유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대라는 말의 뜻을 ‘관계’ 또는 ‘관계설정’이라고 이해하거나 ‘연대감(의식)’이라고 받아들여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사람은 누구나 유대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러 사람이 섞여서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사람 사이의 유대라는 것이 없으면 결국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유대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유대를 만들기 위해 부정한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인간 사회의 모든 부정과 부패의 원천이 이 유대 만들기에 기인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변호사 사회의 유대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일부가 아닌 전체를 관통하는, 전체가 아니라면 대다수 그것도 아니라면 상당수를 묶을 수 있는 유대 내지는 관계, 연대의식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변호사 전체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로서의 유대라는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쉽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 같은 알량한 두뇌의 소유자는 헤맬 수밖에 없는 일. 나는 천성(天性)의 상상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니 그저 시정(市井)적 표현을 도덕적 언어인양 포장한 지극히 평범한 통속적이고 윤리적 회답 밖에는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다만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은 이미 ‘옛날 옛적 고리 짝’의 케케묵은 윤리의식 또는 도덕관념이어서 그것으로는 가치로서의 격(格)을 인정받을 수 없다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지연, 학연이 이해(利害)라는 척도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제는 합(合)시대적 가치가 필요하다. 시대와 병행한 가치, 도덕의 개조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단순한 사고의 유희가 아닌 전신으로 갈망하는 경세적(經世的) 입장에서의 가치창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창조충동에 의하여 불완전에서 완전으로의 진화라는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왔으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변호사는 ‘전체’ 또는 ‘연대’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거부감을 가진다는 것. 따라서 전체, 연대라는 것에 대하여는 마이너스의 관심밖에 없다. 변호사는 이 거부감과 마이너스의 관심에 의하여 스스로를 이 세상의 자발적 고독자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자발적 고독자의 길이 세상의 모든 사상과 주의를 흡수해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사상의 소화력을 상실하게 하는 원흉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변호사가 가진 정신체질의 결정적 약점이다. 변호사가 시대와 세상으로부터 받는 암묵의 탄압으로 인해 희망을 잃었기 때문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희망이라는 이름의 기만이 아무리 변호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이라는 의무를 잊게 한다 해도 또한 희망이라는 것이 그저 ‘목소리가 된 바람’일 뿐이라 해도 변호사는 아직은 생활 자체를 작품화할 수 있는 양질의 정신적 질(質)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결국 이해관계를 능가하는 공통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다르다. 여기에 인간의 불행이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공통의 가치라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변호사는 변호사의 길을 택한 순간 그 가치의 색깔 또는 범주라는 것이 일정한 정도로 제한된 것은 아닐까. 따라서 그 제한적인 색깔 또는 범주 안에서라면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변호사에게 그런 정도의 사고의 정리능력이 왜 없겠는가. 변호사에게는 현재 존재하는 사물과 신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중요시하는 섬세한 정신이 있다. 또 변호사에게는 사물을 일반적, 객관적, 논리적으로 석연하게 정리하는 기하학적 정신도 있다. 그러므로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굴절된 의미의 자만이나 영웅적 자기비대의 감정에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또 절대로 곡선적 선전수법도 아니다.

전 세기에 이 나라의 근대화와 더불어 만들어진 변호사의 이미지, 이미 백년이나 우려먹은 그것과는 다른 합시대적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그 무엇에 해당하는 공통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이제 변호사에게 전신으로 묻고 전신으로 대답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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