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엇인가는 우리가 가장 알고 싶어하는 주제이고, 철학자들의 탐구의 시작이요 마지막 주제일 것이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소수자, 인정, 가족, 기술, 이기주의, 욕망, 개인, 덕(德), 사이보그’라는 아홉개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래서 ‘소수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존재를 묻는 철학 키워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법조인으로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소수자의 개념조차 잡혀 있지 않던 나에게 이 책의 부제는 눈을 확 뜨게 하였다.

저자는 첫장 소수자에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으로 글 문을 연다. 소수자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세입자, 영세자영업자, 장애인, 어린이, 노인, 원도심주민, 농어민,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탈북자, 특수 종교인 등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인 듯이 살아가고 있다. 실제 이들 소수자로 치부되는 부류는 무시하지 못할 수 이지만, 이들은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천개의 고원’에서 다수파와 소수파를 구별했다. 다수파는 한 사회의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모델에 속하는 사람들로 주로 남성, 백인, 이성애자, 도시 거주자가 여기에 해당하고, 소수자는 그와 반대로 중심파 주류의 체계밖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다수자가 수적으로 적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사회의 표준 모델이라면 수적으로 많은 소수자보다 다수자가 된다.

반면에 소수자는 수적으로 적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표준모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있다. 한 사회의 표준모델에서 벗어난 소수자는 사회에서 소외받은 패배자가 되는 것일까? 긍정과 기쁨을 통해 생성의 철학을 말해온 들뢰즈는 오히려 소수자에게서 창조적 역량을 발견하고 기대한다. 다수자가 권력의 중심부에 서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맺기에 몰두한다면, 소수자는 권력이나 지배의 영역과 다른 생성의 역량에 관계한다. 소수자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갇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신을 꿈꾼다. 이렇게 변신하는 것은 자신을 창조의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으로 소수자의 힘은 스스로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소수자를 억압하는 사회체계를 탈피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한 사회는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가치 기준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들뢰즈는 ‘소수자-되기’의 첫 번째 생성의 출발점을 우선 남성의 ‘여성-되기’로 설정하면서 ‘입장바꿔 생각하기’를 해보자고 한다. 이러한 ‘되기’ 철학의 궁극적인 의미는 고정된 현 지배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가상토론에서 ‘차이가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남성과 여성은 단지 ‘차이’가 나는 존재라고 강변한다.

소수자 이외에 현대 사회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언어로 ‘인정욕구’가 제대로 실현되지 아니하는 사회는 삶이 피폐해지고 악행이 만연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평등과 우월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싸움을 벌이고, 자신의 권리와 주체성을 서로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 ‘인정 투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남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등함을 인정하려면 양자가 만나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 안에 나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지는 않은지, 내 안에 상대방의 모습은 없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 모습을 찾을 때 서로 동등하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다른 것’‘차이가 있는 것’을 바라볼 때 하나는 ‘정상’이고 다른 하나는 ‘비정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편견이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서로 다르다고만 하면 안되고, 차이 가운데서도 하나로 통합되는 ‘보편성’과 ‘동등성’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동등성 속에서도 묻어나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혼란을 극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와같이 차이 가운데서 통합되는 보편성과 동등성을 찾아낼 수 있는 여유와 안목만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도 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소수자를 더 이상 소수자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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