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야, 어떻게 돈까지 받으면서 나쁜 사람을 변호하냐?” 친구는 변호사가 피고인 옆에서 폼 잡고 있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못마땅했나 보다. 나는 주로 형사사건을 변론하다 보니 이러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난다. 질문을 받으면 졸지에 내가 부도덕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씁쓸한 생각도 든다.

내 답변은 이랬다. 우선,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그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인지 모른다. 피고인 중에는 죄지은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내 사건 중 피고인이 2011년에 필로폰을 투약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는 게 있다. 그런데 증거로 제출된 주사기는 2011년에 사용된 게 아님이 분명했다.

이때 변호인은 “주사기가 발견되었으니 죄가 인정됩니다”라고 해야 될까? 피고인이 실제 마약을 했는지 변호인은 모른다. 변호인은 피고인이 2011년에 투약한 증거가 없다는 것만 주장하면 된다. 피고인이 무죄를 받는다면 범죄를 밝히지 못한 검사의 책임일 뿐이다.

검사만 정의에 가깝다고 오해하기 쉽다. 정의란 상대적이다. 검사의 입장에서 추구하는 정의가 있고 변호인이 추구하는 정의가 있다. 등산을 할 때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럿 있듯, 정의로 가는 길도 다양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정상을 오르면 된다. 검사는 증거를 찾고 변호인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증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결국 검사만 진실을 찾는 사람이 아니다. 변호인도 진실을 찾는 사람이다. 피고인의 입장에서 진실을 찾아간다는 게 다를 뿐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어느 한쪽이 정의라고 예단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둘째로, 피고인이 진범이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을 때 무조건 극형에 처하는 게 정의인가? 얼마 전 춘천에서 한 고등학생이 친형을 칼로 찔러 죽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그 학생을 살인범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그런데 배심원과 재판부의 판단은 의외로 ‘무죄’였다. 진범이라도 무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유죄라고 해도 적절한 양형을 찾아가는 절차가 필요하다. 무조건 중형을 선고하는 게 정의라면 북한처럼 피고인을 공개 처형하거나, 장기간 고통을 느끼게 하면 될 것이다.

그 고등학생은 아버지와 형의 학대에 노출된 채로 성장했다. 참고, 참고, 참다가 특수한 상황에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다. 변호인은 피고인이 범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성장과정을 겪었는지, 정신질환은 없었는지, 범행 상황은 어떠했는지 등을 살펴 무죄나 적절한 양형을 주장한다. 변호인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진실을 찾아 제3자인 법원이 적절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징역 100년이 정의인지, 3년이 정의인지는 재판 전까지 알 수 없다.

셋째로, 피고인이 진범이고 아무런 참작사유도 없는 흉악범이라면 피고인을 위해 변론을 하는 것은 부당한가? 여기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극악무도한 흉악범인지는 재판을 해 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검찰은 그가 잔인한 흉악범이라는 증거를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이제 변호인은 증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마음을 열어 피고인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

3년에 불과한 경험이지만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변호인이라면 억울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피고인의 호소가 거짓일 수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기회를 주어야 흉악범이라도 재판 결과에 수긍하게 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명언처럼, 재판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진실’이 사건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검사는 그 ‘진실’을 굳이 찾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변호인은 그것을 찾아내어 법정에 꺼내 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범죄자들은 대부분 소외된 채 살아온 사람들이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이들을 적절히 케어하지 않으면 사회가 건강할 수 없다. 농작물 하나를 키우려고 해도,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 엎고 비료를 뿌린다. 범죄자는 음지에서 부패한 흙과 같다. 변호인이 햇빛을 쐬어주고 비료를 넣어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새 출발의 첫 걸음은 재판에 대한 진지한 수용이다.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위안을 느낀 피고인들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갱생의 길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한마디 한다. “불리하면 말이 길어진다던데…. 찔리는 모양이네?” 나는 ‘짧게’ 덧붙였다. “변호인은 나쁜 놈이 아니라 나쁜 놈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도와주는 거야. 나쁜 놈도 알고 보면 보통 놈이거나 심지어 너보다 좋은 놈일 수도 있어.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것 같지? 우리도 언제든 ‘그런 놈’으로 불릴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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