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라고 오랜만에 떡을 실컷 먹었더니 뱃속이 편치 않다. 소화제 삼아 떡 이야기나 해볼까 한다.

보리개떡 - 옛날 양식 떨어질 걱정을 하던 시절에는 갱죽이라고 하여 쌀 한 줌으로 죽을 끓이되 시래기나 산나물 따위를 듬뿍 넣고 물을 가득 부어 온 식구가 둘러앉아 훌훌 둘러마시는 식사를 하곤 했었다. 쌀 대신 나물과 물로 배를 채워 허기를 면하는 것이다.

그런 시절의 음식 가운데에 보리개떡이라는 것이 있었다. 떡은 떡인데 가장 형편없는 재료로 만드는 개떡. 다른 것이 아니라 보리를 빻을 때 부산물로 나오는 등겨를 마치 밀가루라도 되는 양 쪄서 떡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리는 벼와 달리 그 껍질이 두껍고 질겨서 빻을 때 여러 번 빻게 된다. 그러면 그 껍질이 아주 곱게 빻아져서 마치 밀가루처럼 고운 입자로 된다. 보통은 돼지나 소의 먹이로 사용되는 것이지만 사람이 먹게 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리개떡이다.

나 어릴 때 우리 집은 그래도 시골에서는 부자라는 말을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이 보리개떡을 먹는 일이 없었으나 이웃에서는 그것을 먹는 것을 자주 보고 자랐다. 그런데 어린 생각에 그 보리개떡이 참 맛있게 보였었나 보다. 할머니를 졸라서 우리도 남들처럼 보리개떡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쌀가루도 좀 섞어 넣고 하여 제법 그럴듯한 보리개떡을 만들었는데 막상 입에 넣어 씹었을 때, 그 맛이 어떠냐고 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우선 입안이 모래라도 가득 씹은 양 엉망진창으로 되고 말았다. 도대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친 보리등겨가 입안에 가득 찼으니 그럴 만도 하다. 금방 뱉어버리고 물로 입안을 헹구고는 다시는 보리개떡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옛일을 너무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내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지구상 어디에서는 아직도 양식이 부족하여 굶기를 먹듯이 하고 지내는 수도 많다고 하니 잊어버리기는 커녕 가물가물하는 기억을 애써 되살려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콩송떡 - 추석에는 누구나 송편을 빚어 먹는다. 달의 모양을 본뜬 송편은 '달떡' 또는 '월병(月餠)'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데 우리는 '송편'이라고 부른다. 송편을 찔 때 솔잎을 깔아 그 향기를 빌리는 데에서 나온 이름인 듯한데 한자로 쓰면 ‘송병(松餠)’이라는 멋대가리없는 말로 될 수밖에 없으니 순우리말로 쓰자면 ‘솔편‘이나 ’솔떡‘이 더 적당할 듯하기도 하다.

송편의 껍질은 그냥 맵쌀가루를 반죽하여 쓰는 것이므로 어느 집에서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 껍
질 안에 속으로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질 뿐이다. 검은 깨를 넣기도 하고, 녹두가루를 넣기도 하고, 밤이나 대추를 넣기도 하고. 가장 맛있는 것은 검은 깨를 넣는 것이었다. 고소하고 달콤하며 뽀드득 뽀드득 씹히는 맛도 좋고.

나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검은 콩을 넣었었다. 검은 콩을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그냥 통째로 넣었다. 송편껍질 안에다가 검은 콩을 통째로 한 숟갈씩 넣어두면 그 맛이란 것이 무덤덤하여 도저히 검은 깨나 녹두가루를 넣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싱거웠다.

그래서 어머니께 우리도 남의 집과 같은 송편을 만들자고 졸라보기도 했으나 왜 그랬는지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해마다 검은 콩을 통째로 넣은 송편 만들기를 고집하셨다. 재료가 없거나 만들기 쉬워서 그랬을까? 아이들이 조르면 한번쯤은 들어주실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속에 검은 콩을 통째로 넣은 송편은 그 맛을 음미하고자 하면 한참을 꾹꾹 씹어야 한다. 얼른 씹어 꿀떡 삼켜 가지고는 도저히 맛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 대신 한참을 침을 섞어 꾹꾹 씹고 있으면 그런대로 구수한 맛을 희미하게 느낄 수가 있다. 그런 맛을 '깊은 맛'이라고 하던가?

우리 어머니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런 '깊은 맛'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러 검은 콩을 통째로 넣은 송편을 만드시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소하고 달고 그런 얕은 맛만 추구하다가는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으니 검은 콩 넣은 송편을 씹듯 천천히 꾹꾹 씹으며 인생의 깊은 맛을 음미하고 살아가라고. 인생의 깊은 맛이란 것도 결국은 희미하지만 오랫동안 천천히 씹어 구수하게 느끼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추석이라고 차례상에 올릴 송편을 빚기는 했으나 방앗간에서 돈 주고 빚어 온 것이다. 모양도 달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 손으로 꾹꾹 눌러 놓은 우그러진 모양이다. 무슨 송편이 이런가! 이건 송편이 아니라 그냥 떡이잖아! '송떡'인가?

허, '송떡'이라!

그렇다면 검은 콩 통째로 넣은 '콩송떡'이라도 한번 만들어 먹어볼까 보다. 커다랗게 입 안에 넣고 꾹꾹 씹으며 깊고 구수한 옛맛을 느껴보고 싶다. 천천히 오랫동안.
 
경제가 어렵다면서도 임시공휴일이니 대체공휴일이니 자꾸 만들어 일하지 않고 놀면서 소비 많이 하라고 부추기는 세태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보리개떡이니 콩송떡이니 뜬금없는 말을 하여 분위기를 깨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더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되새기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은 기댈 데 없는 서민들의 전통적 생존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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