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변협의 역사탐구는 주로 해방 이후 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법관시보, 사법대학원, 사법연수원, 로스쿨로 이어지는 우리의 법조인 양성제도를 살펴보다보니 근대적 사법제도가 발생하여 발전한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법조인 배출제도를 피해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사법제도가 도입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특정부분의 관리양성을 위한 ‘법관양성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불행하게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7년에는 ‘한국내정에 관한 통감의 권한에 대한 협정(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까지 모조리 일제의 관할로 넘어갔다. 따라서 그 이후는 일제시대 법조인 양성제도의 고찰이 될 것이다. 물론 갑오개혁이 일본의 영향 하에 이뤄진 것이고 보면 해방 전 법률제도는 일본제도의 답습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양성소는 1895년에 조선조 고종이 반포한 칙령 49호인 ‘법관양성소 규정’에 따라 대한제국 법부 산하의 국립교육기관으로 설치됐다. 기존 전통 법학과는 사뭇 다른 서구 법학을 수용, 전문적인 근대 법학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법관 양성소는 법학 통론을 비롯, 민법, 상법, 형법, 소송법, 국제법 등의 과목으로 1895년 4월 16일 6개월 과정으로 개설되어 1기생 50명을 입학시켰고, 6월에 다시 2기생 50명을 모집했다. 그러나 3기생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1903년(광무7년)에 휴식 8년만에 재개됐다. 그러나 사법권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1909년에 법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1년에 경성전수학교, 1922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 1926년에 경성제대법문학부가 개설되어 기존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병존하다가 8·15 광복 후인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승계 발전되었다.

한편, 법관양성소의 개관은 사립학교에서 전문법학 교육을 강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했고, 자료는 거의 없지만 1896년에 서울의 사립법률학교가 첫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05년에는 지금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 법률과가 생겼다.

이 법관양성소를 나온다고 다 판검사가 된 것이 아니고, 판검사 임용을 관장하는 법관전고소(法官銓考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이 법관양성소 소속의 대한제국 법부가 폐지되고 학부로 이전하면서 법학교로 이름이 바뀐 것은 위에서 설명하였는데, 재미난 것은 우리가 지금 ‘법과’가 아니라 ‘법학과’로 부르고 있는 이유가 소속이 학부로 바뀐 ‘법학교’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된다는 것이다. 근거있는 추론인지 여부는 확인되면 다시 이곳에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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