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지치고 힘겨울 때 나는 법정스님께서 출간한 책들을 뒤적거리곤 한다. 스님께서는 욕망과 아집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조언해주시곤 했다. 스님께서는 승려이자 수필가로서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인 ‘무소유 정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스님께서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태어나셔서 23세인 1954년에 효봉스님의 제자로 출가하셨다.

효봉스님은 조선조 말인 1888년 평남 양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사서삼경을 배웠고 14세에 평양감사가 개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한다. 후에 명문인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26세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법관이 된 분으로 유명하다.

효봉스님은 일제치하에서 10년간 (1913~1923) 법관생활을 하면서 고통과 회의를 느끼면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1923년 36세에 평양복심법원 판사직을 수행하던 그는 10여년의 판사 생활 중 처음으로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으며 이 일로 사흘 밤을 새우며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라는 판결을 할 수 있다니, 내가 무슨 권리로 타인의 생명을 끊으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라며 식음을 전폐하며 고뇌하던 스님은 결연히 판사직을 버리고 엿판하나 메고 고행길 구도자 엿장수로 나섰다고 한다.

방황의 길을 걸은지 3년 만에 스님은 신계사 석두스님을 만나 출가를 하게 되고, 43세(1930)에 토굴에 들어 44세 여름에 견성(見聖)하였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한번 삼매에 들면 엉덩이가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스님들 세계에서는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사상과 행동의 기반을 형성하는데 은사스님이신 효봉스님의 영향이 컸음은 물론이다.

법정스님께서도 중학교 1학년 때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같은 반 동무들과 함께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인 엿장수를 속여 엿을 빼돌려 먹었던 일을 평생 자책하였다고 하며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신의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고 견디셨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법정스님을 만나 뵌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힘겨울 때 늘 함께 해주셨던 고마운 분으로 스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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