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15. 8. 27. 선고 2012다204587 판결 - 이른바 “도라산역 벽화 사건 판결”

I. 사실관계
원고는 도라산역사 내 벽 및 기둥에 14점의 벽화(폭 2.8미터, 총 길이 100여 미터에 이르는 대형벽화, 이하 ‘이 사건 벽화’라 함)를 제작 설치했고, 소외 건설회사로부터 이 사건 벽화의 제작설치 대금을 모두 지급받았다. 이후 소외 건설회사는 역 건축공사를 완료해 한국철도시설공단에게 시설물 일체를 인도했고, 동 공단은 2008년 1월경 피고 대한민국에 인도함에 따라, 피고는 이 사건 벽화를 소유하게 됐다. 그런데 피고는 이 사건 벽화에 대한 부정적 여론(일반적으로 색상이 어둡고 난해하며 그림 내용을 이해하기 곤란하고 민중화로 ‘무당집’ 분위기를 조성하여 공공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이 있다는 이유로 2010년 5월 18일 이 사건 벽화를 철거했다. 설문조사 및 전문가 간담회 개최로부터 완전 철거까지는 3개월 정도가 소요됐고, 이 과정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아 원고는 이 사건 벽화가 철거 후에 소각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II. 법원 판단
1. 재판 경과
원고는 피고에게 금 3억원 및 벽화 철거 관련 저작인격권 침해 인정에 관한 광고문을 일간지에 게재할 것을 청구했는데, 청구원인은 저작인격권(동일성유지권) 침해와 예술의 자유 또는 인격권 침해 등 두 가지였다.
1심(서울중앙지법 2012. 3. 20. 선고 2011가합49085 판결)은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으나, 항소심(서울고법 2012. 11. 29. 선고 2012나31842 판결)은 저작인격권 침해 주장은 기각하고 예술의 자유 또는 인격권 침해 주장은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해 원심이 확정됐다.

2. 대법원 판결(이 사건 판결)의 요지
원고가 상고하지 아니하여 원심에서 기각한 동일성유지권 침해 주장은 대법원의 심판대상이 되지 않았다. 즉 피고 소속 공무원의 행위를 원인으로 한 원고의 인격적 이익 침해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것만이 상고심의 심판대상이었다.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의 ‘법령을 위반하여’라고 함은 엄격하게 형식적 의미의 법령에 명시적으로 공무원의 행위의무가 정하여져 있음에도 이를 위반하는 경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인권존중·권력남용금지·신의성실과 같이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준칙이나 규범을 지키지 아니하고 위반한 경우를 비롯하여 널리 그 행위가 객관적인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도 포함한다(대법원 2012. 7. 26. 선고 2010다95666 판결 등 참조)고 전제한 후, 예술작품이 공공장소에 전시돼 일반대중에게 상당한 인지도를 얻는 등 예술작품의 종류와 성격 등에 따라서는 저작자로서도 자신의 예술작품이 공공장소에 전시·보존될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정당한 이익을 가질 수 있으므로, 저작물의 종류와 성격, 이용의 목적 및 형태, 저작물 설치 장소의 개방성과 공공성의 정도, 국가가 이를 선정하여 설치하게 된 경위, 폐기의 이유와 폐기 결정에 이른 과정 및 폐기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국가 소속 공무원의 해당 저작물의 폐기 행위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고 저작자로서의 명예감정 및 사회적 신용과 명성 등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행위로서 위법하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서 대법원은 “원고는 특별한 역사적,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도라산역이라는 공공장소에 피고의 의뢰로 설치된 이 사건 벽화가 상당기간 전시되고 보존되리라고 기대하였고, 피고로서도 이 사건 벽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홍보까지 하였으므로 단기간에 이를 철거할 경우 원고가 예술창작자로서 갖는 명예감정 및 사회적 신용이나 명성 등이 침해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피고가 이 사건 벽화의 설치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사유를 들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그 철거를 결정하고 그 원형을 크게 손상시키는 방법으로 철거 후 소각한 행위는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은 행위로서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하여 위법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피고의 이러한 이 사건 벽화 폐기행위로 인하여 원고가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분명하므로, 피고는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따라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III. 검토
1. 이 사건 판결에 대한 평가
원심은 피고의 국가배상책임의 직접적 근거로서 물품관리법시행령 제51조 제2항의 위임에 따라 정부미술품의 관리를 위해 제정된 정부미술품 보관관리규정에서 정한 절차위반을 든 데 반해, 이 사건 판결은 구체적인 법령 위반을 들지 않고도 위 요지에서 본 바와 같이 국가 소속 공무원의 해당 저작물의 폐기 행위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고 저작자로서의 명예감정 및 사회적 신용과 명성 등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행위로서 위법하다고 인정한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81년 뉴욕 연방정부 광장에 설치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운 호(Tilted Arc)’라는 조형물(높이 3.7미터, 길이 36.6미터의 휘어진 강판)에 대해 공공의 통행에 방해되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됐고, 여러 차례의 토론과 공청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1989년 법원 판결에 의해 해체된 사례가 있다[Serra v. US GSA, 847 F.2d 1045 (1988)]. 여론 조사로부터 단 3개월 만에 예술가를 배제한 가운데 철거가 이루어진 이 사건 판결 사안과 8년 동안 각종 토론과 법정 공방을 거쳐 해체가 결정된 위 사례는 크게 다르다고 하겠다.

2. 이 사건 판결의 한계 및 추가적 논의
이 사건 판결은 국가가 매입하여 소유자가 된, 공공장소에 설치된 예술품이라도 폐기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경우 위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으로 당해 사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 판결은 예술품 소유권자의 사실적 처분행위와 창작자의 민법상 인격권이 충돌하는 일반적 사안에서 선례가 되기에 부족하다. 첫째, 이 사건에서 국가가 폐기절차를 지켰다면 결론이 달라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인 간에서라면 이 사건 판결에서 인정된 공무원의 인권존중, 권력남용금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른 행위의무를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사건 판결은 예술품 소유권자의 사실적 처분행위와 창작자의 저작권법상 저작인격권(동일성유지권)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선례가 되기에도 부족하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부분은 상고심 심판대상이 아니므로 이 사건 판결에서 판단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비록 이 사건 판결의 쟁점은 아니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소유권과 저작권(저작인격권)의 충돌 문제에 관해 짧은 논의를 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가 적법하게 매입하여 소유한 예술품(장소특정적 미술, site-specific art)을 절차를 거쳐 폐기한 경우와 예술품의 소유권자가 국가가 아닌 사인인 경우(예컨대 서울 대치동 소재 포스코빌딩 앞의 조형물, 프랑크 스텔라의 ‘아마벨’), 소유권자가 소유권의 권능 중 하나인 사실상 처분행위로써 예술품의 폐기했다면, 이 사건 판결은 이런 가정적 사안들에 대해 해답을 주지 못한다. 물론 국가, 지자체가 절차를 지켜 폐기한 경우와 사인이 소유권 행사로써 폐기한 경우는 적법한 것이므로 저작권자가 대항할 수 없다는 견지에 설 경우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창작물을 창작자의 ‘인격의 연장(extension of personality)’으로 이해하는 헤겔(Hegel) 류의 인격이론(Personality Theory)에 설 경우, 아무리 소유권자라 하더라도 그 소유권 행사에 일정한 제한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은 소유권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전통 이론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조형물이 부합된 건물의 소유자가 건물을 허물고 재건축할 경우 조형예술의 저작권자가 저작권으로 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예컨대 이 사건에서와 같이 사실상 예술품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서 비롯돼 철거하는 경우라면, 소유권 행사의 제한 가능성을 조심스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정신과 혼이 담겨 있지 않은 물건(예컨대 공산품)이라면 소유자가 임의로 폐기, 훼손 등 사실상 처분하는데 그 어떤 제약이 있을 수 없지만,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예술품으로서, 특히 공공장소에 설치되었거나 건물에 부합되어 공공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경우라면, 재건축 등 특별한 사유가 아닌 한 소유권자라 하여 함부로 훼손하거나 폐기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부담한다는 법리 구성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추후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위와 같은 경우 저작권자가 저작인격권으로 소유권자의 소유권 행사를 제한하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이 사건 판결에서와 같이 공공장소에 자신의 예술품이 전시 보존될 것이라는 점에 대한 정당한 이익을 민법상 인격권 침해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작권법상 저작인격권은 민법상 인격권의 특수한 경우라 할 것이므로, 저작인격권 침해가 되지 않을 경우 인격권 침해로 구성하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 판결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다.

IV. 여론(餘論)
스페인이나 터키와 같이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순차적으로 지배했던 나라의 유서 깊은 건축물에는 극도로 대립하며 싸웠던 두 종교 세력이 상대방을 물리친 후에도 이전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지우지 않고 그 위에 덧칠을 한다거나 보존한 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양립불가능해 보이는 문화의 병존 현상은 그 자체가 역사가 되고 문화유산이 되어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예술관에 따라 앞선 예술을 훼파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短見)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득이 철거해야 할 사정이 있는 경우라도 미국의 세라(Serra) 사례에서와 같이 절차를 지키는 것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한편,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는 일정규모 이상 건축물의 건축주는 건축비의 1% 이하의 범위에서 일정 금액을 미술작품 설치에 의무적으로 쓰도록 하고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된 지 만 20년(1995년 법 개정으로 도입)이 됐다는 점에서 건물의 노후화 또는 도시 재건축 및 재개발 사업에 따라 사인(건축주와 조형예술가) 간에 소유권과 저작권법상 동일성유지권 또는 민법상 인격권의 충돌 문제가 빈발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사건 판결을 넘어 이에 관한 깊은 연구가 진행돼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