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일요일 낮.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손에 든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눈이 순간 촉촉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저림이었다. 소녀의 오해가 불러온 젊은 연인들의 비극. 그 비극이 끝내 너무나 깊이 사랑했던 두 사람을 다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채 각자 다른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대목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열 세 살의 글쓰기를 좋아하고 감수성 풍부한 소녀 브리오니는 사촌언니의 강간범으로 로비를 지목한다. 피해자 소녀는 강간범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유일한 목격자는 브리오니 뿐이다. 로비는 필사적으로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유죄가 선고되어 독방의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게 되었으며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깊은 사랑에 빠진 연인 로비와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는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하고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한 소녀가 자신이 보고 믿은 것을 온전히 진실이라고 판단하고 한 잘못된 증언이 의사 지망생이었던 한 젊은 남자의 인생을,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랑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왔고 브리오니는 평생을 통해 속죄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매일같이 형사사건 기록에 파묻혀 사는 내게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영국이지만 2010년대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은 벌어지고 있다. 사건에 관련된 당사자 혹은 목격자들이 ‘때렸다- 안 때렸다- 했다- 하지 않았다-’와 같이 하늘 아래 양립 불가능한 사실관계를 주장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목격자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목격자 없이 피고인과 피해자 단 둘만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적지 않다. 둘 중 한 사람 혹은 한 쪽 편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법정 증언도 불사한다. 위증의 선서를 하고 자신이 본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상반된 증언은 사건을 더욱 미궁 속에 빠트릴 뿐이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결국 죽어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피고인이 피해자나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죄가 인정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라는 것이 피고인과 감정적으로 악화되어 있는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이 유일한 직접증거인 경우도 없지 않다. 끝끝내 억울함을 호소하며 중형의 선고를 받은 피고인은 이미 한 범행에 더불어 죄를 부인하는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범죄자였을까. 아니면 이 시대의 브리오니에 의해 무고한 옥살이를 하게 된 또 한명의 로비일까. 고심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이 재판 결과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진실이 무엇인지, 옳음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무척 마음이 불편했다. 못내 찜찜했던 나는 이례적으로 법정구속된 피고인을 대신 해 피해자를 직접 만나 합의를 시도했다. 증인신문 당시 그토록 앙칼지게 추궁하던 변호인과는 동일성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변호사로 변모하여 설득에 돌입했다. 의외로 순순히 합의서를 써 주었다. 물론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후 일이다. 합의서라니. 피고인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고 했고 나 역시 그에 합심하여 한 치의 양보 없이 무죄를 주장했던 사건인데 어느새 내 손에는 합의서가 들려있었다. 항소심 국선변호인을 찾아 그 주소로 등기우편 발송을 한 후 못내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렸다.

로비의 변호사도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을까. 로비씨. 당신은 미성년자를 강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며 목격자도 있어요. 그 목격자는 13세 소녀로서 진술의 신빙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 지금이라도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 소녀와 합의하여 조금이라도 양형상 참작을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하고 말이다. 로비는 에누리 없이 중한 처벌을 받고야 말았다. 유능한 변호사를 못 만난 탓일까.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고 하며 증거재판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형사재판의 그 대원칙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법정 밖 변호사로서 나는 증거변호를 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드러난 증거만으로 보아서는, 수사기록으로 보아서는 유죄 판결이 날 것이 분명해도 눈을 마주치며 장시간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진심이 전해져 오면 그야말로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뛰어들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판결 선고 후 항소장을 집어넣고 내 발로 합의서를 받아오는 사태까지 이르기도 했다.

연차가 쌓여가긴 하나 한없이 겸손해진다. 과연 변호사의 실력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최선인지. 진실 혹은 거짓은 여전히 너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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