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과잉성 처리의 방법으로 ‘낭비’의 길 이외에 ‘성장’의 길이 있다는 것, 그 ‘성장’이란 다름 아닌 변호사 개개인이 가진 ‘힘의 합성’에 의해 폭발력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는 것 그리고 ‘힘의 합성’은 ‘관계’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러면 우리 눈앞의 현실은 어떤가. ‘힘의 합성’이라는 주관적 희망이 아닌 ‘힘의 분산’이라는 객관적 현실에 절망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변호사 전체의 힘이라는 것이 개개인의 힘과 능력의 덧셈의 총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폭발력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변호사 개개인의 능력 즉 ‘미시’의 효율성과 전체로서의 ‘거시’의 효율성과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전체로서의 ‘거시’의 효율성이 ‘미시’의 효율성을 저하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수(數)의 세력화,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합성(合成)의 오류(誤謬)가 아니겠는가. 변호사가 앓고 있는 중병이다.

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와 변호사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 그 길에 희미한 빛이 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관계설정’에 의해 변호사의 힘의 세력화, 조직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설정이란 세력화, 조직화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변호사 사회를 관통하는 ‘일관된 사고’(의지라고 말해도 좋고 목적 또는 희망이라고 말해도 좋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변호사 사회에는 그런 것이 없다. 변호사 개개인이 거대한 사고의 소유자일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관철도가 높은 목적의식은 공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더구나 변호사가 갖는 자존심은 현실과의 격투에서 병적인 공포심을 낳았다. 그것이 집단패배심리라는 정신체질을 만들었고 다시 상상력의 결여라는 체질적 결함을 생산했다. 이런 마당에 목적의식은 사치가 되고 말았던 것.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목적의식의 상실은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변호사가 쉽게 빠지는 열등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도대체 자존심과 열등감은 표리관계 아닌가. 이제는 열등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요 이상의 자신감 상실에 사로 잡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식민지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스스로에 대해 엄격한 정신가가 되는 것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정신체질의 변환이 없이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열등감의 극복 없이는 ‘일관된 사고’의 꿈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일관된 사고’ 다음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변호사 단체’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그 당시, 그 국면에 있어서의 현실분석력과 직시정신이 뛰어난 운전자가 있었고 그 운전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그 담당자가 되었다. 지금의 세상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단체가 그 운전자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변호사단체 말고 그 운전자가 될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변호사단체는 ‘구름 위의 궁전’일 뿐이다. 땅에 있는 회원인 변호사의 눈에는 단체가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글자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궁전일 뿐이다. 이 말은 회원과 변호사단체와의 체감적 괴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통함을 넘어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변호사단체는 자신이 마치 부권적(父權的) 중량감을 가지기라고 한 것 처럼 행동하는 말도 안되는 구시대적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요컨대 구름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 한편 변호사는 단체 아래 모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단체가 운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세력화, 조직화 아닌가. 그것이 가능하면 변호사에게 새로운 운명, 새로운 길이 생긴다고 믿는다. 변호사단체가 주도하는 세력화, 조직화의 길 이외에는 달리 변호사의 내일을 밝혀줄 등불이 없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집단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 엘리트 집단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이 절대 경지를 결코 잃지 말아야 한다. 그 길은 ‘합성의 오류’를 극복하는 데 있다. 세력화,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다.

변호사는 세상이라는 스크린에 비친 자화상에 놀라지 말고 내공의 힘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수(數)의 저주(詛呪)’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이 말이 빗나간 형용과잉의 수사(修辭)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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