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펜의 마지막 밤, 호텔 로비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얼쩡대다가 캄보디아 문화부 직원에게 막무가내로 끌려서 승용차에 올랐다. 주머니에는 방 열쇠 밖에 없었고 휴대전화도 지갑도 방에 두고 나왔었다. 급히 서울로 돌아갈 일이 생겼다고 항공편을 바꾼 고대 이대희 교수를 배웅하러 로비로 내려왔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캄보디아 공무원은 이 교수를 공항에 내려놓고 차를 엉뚱한 곳으로 몰았다. 지난밤에 폭우가 쏟아져 도로는 물웅덩이 투성이였고, 늘상 그렇듯이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엉켜 밤길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가로등 불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후미진 곳에 차를 세우는데 약간 불안하였다. 어쩔 수 없이 성큼성큼 앞 서 가는 그를 따라갔다. 외국인은 전혀 보이지 않는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한쪽 구석 칸막이로 고개를 들이밀자 박수가 터졌다. 캄보디아 문화부 저작권과 직원 열댓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절로 입이 딱 벌어지며 가슴이 묵직해 졌다.

프놈펜에서 국제지적재산권기구(WIPO) 회의가 1주일 내내 열렸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제네바 본부와 호주·말레이시아·한국에서 온 전문가와 동남아시아 각국 공무원들이 국가별 저작권 역량구축(capacity building) 수준에 대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금년에는 음악분야의 신탁관리단체(Collective Management Organization) 구성이 주로 논의되었다. 한주일 내내 진행된 회의이니만큼 실무를 맡은 캄보디아 문화부 직원들은 탈진하였을테고, 저작권 과장이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회식자리라고 하였다. 누구인가가 ‘한국에서 온 미스터 홍에게 깜짝 송별연(surprise farewell party)을 해주자’고 제안을 하여 급작스럽게 부서 회식이 ‘미스터 홍 환송회’가 되었다고 옆자리에 앉은 이가 귀띔하였다. 제네바 본부에서 온 WIPO 간부도, 시드니에서 온 국제저작권 현장 전문가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온 박식한 교수도 다 제치고 오로지 ‘한국에서 온 홍모’만 부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는 데는 감격할 따름이었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아시아 각국 저작권 전문가들은 한국을 익숙해 하였다. 모두들 한국에 여러 번 출장을 다녀갔고, 특히 최빈국 공무원들은 KOICA 혹은 한국저작권위원회(KCC)의 교육 프로그램 혜택을 누린 경험이 있었다. 대한변협이 아시아변호사협회장 회의를 주최하면서 몇 개 빈곤국가 변호사협회장에게 항공권을 제공하였던 일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번 회의에 참석한 공무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가장 엘리트일테니 국제기구나 선진국의 지원으로 해외경험을 축적하였을 법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의 프로그램이 체계적(systematic)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루는 식사 도중 한국에서 본 눈(snow)이 화제가 되었다. “추위가 견딜만하더냐?”는 질문에 “KCC가 따뜻한 옷을 입혀주었다”는 답이 즉각 나왔다. 우리나라의 초청기관이 연수생 수에 맞추어서 방한복을 마련하였고, 그러한 세심함이 이들의 마음을 산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나라의 공공원조가 모범사례라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우리가 배곯았던 경험이 생생하기에 수혜자의 자존심을 배려하면서도 의욕을 부추기는 원조에 노하우가 생겼고, 그래서 지원의 결과가 현실화되는 드문 예라고는 막연히 알고 있었다. 프놈펜에서 그 현황을 경험하였다. 그들이 그날 밤 ‘한국에서 온 미스터 홍’을 떠올린 것은 KCC가 열대지방의 공무원들에게 눈밭에서도 뒹굴 수 있는 방한복을 마련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KOICA가 울산으로 부산으로 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가난한 나라 공무원들이 한국을 꼭 닮고 싶은 형제국가로서 가슴깊이 새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를 옮겨 2차로 노래방을 갔다. 구성진 노래 가락도 우리 트로트와 비슷하고, 동료가 노래하면 몰려나와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도 똑 같았다. 한국 가요책을 찾아 주기에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캄보디아 저작권 과장이 손을 잡고 내년 회의에서 다시 만나자고 여러 번 당부 하였다. 자정이 훨씬 넘어 숙소로 돌아왔으나 새벽까지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밥상은 스텝들이 다 차려 놓았는데 상(賞)은 자신이 받았다”던 영화배우 황정민의 수상소감이 생각났다. KOICA와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정교한 지원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담당자들, 참 훌륭한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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