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은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화려한 여인들보다 진미를 만드는 가정주부가 더 아름답다. 어떤 요리가 맛있을까? 먼저 먹기 편안해야 하고 몸에 건강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미각세포 골고루 그 맛의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음식을 먹고 난 다음 그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 요리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식자들 각자의 취향이 다르므로 모두를 만족시키는 요리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 요리사는 적절한 조미료와 향신료를 첨가해 맛의 묘미를 더해야 한다. 그렇다고 요리의 달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임지호씨는 자연요리사로서 우리 주변의 식물들을 요리하여 우리 몸이 그 음식맛에 반응하게 하는 데 일인자가 되었다.

아직 초임변호사의 티를 벗지 못한 내 경우 가끔 법률자문이 어떤 때에는 요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하였다. 법학입문부터 변호사가 되기까지 과정에서는 법학은 정답이 주어진 것으로 알고 훈고학적인 학습을 하였다.

그러나 변호사로서 송무업무를 하게 되면서 현실적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뢰인의 입장에서 유리한 법리를 개발하고 사실관계를 그 틀에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게 되었다. 법률을 나 혹은 나의 의뢰인의 주관적인 측면에 유리하게 만드는 ‘법률요리’가 필수적인 작업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

차량으로 타인을 위협한 것을 형법 제261조 위험한 물건을 휴대한 것으로, 상간녀의 동의만 받고 주거에 출입한 것을 형법 제319조의 주거의 평온을 깨뜨린 것으로, 검사가 피의자와 성관계를 맺은 것을 형법 제129조의 직무의 대가로 의율한 것이 바로 법률요리의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법적 정의와 형평성을 추구해야 할 법조인이 법률요리에 몰입하는 것은 어쩌면 불의에 타협하는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이는 정의의 추의 형상을 망각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법률세계를 지배하는 논리는 저울추의 상대적인 기울기에 따라 정의의 편에 서는 것 아니겠는가? 대법원 판례도 다수설과 소수설로 나뉘고, 이 또한 세월이 흘러 다수설이 소수설로 역전되기도 한다.

요즘 같이 까다로운 의뢰인들이 많은 세상에는 주문하는 사항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들은 미리 의뢰할 내용들을 인터넷을 통해 판례 등을 검색하고 여러 변호사들과 면담을 하는 ‘법률쇼핑’을 즐긴 후 특정변호사들에게 사건을 맡긴다. 사건을 맡긴 후에도 서면의 내용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수정을 요구할 때가 많다. 어떤 경우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관계를 가끔 특정내용을 숨기는 방법을 동원하여 변호사를 속여 이를 이용해 승소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초임변호사는 그런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의뢰인과 상대하는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서면을 작성하는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사실관계를 요건사실에 맞게 적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절히 자신의 의뢰인에게 유리한 사실관계를 만들고 이를 부각시키고 불리한 내용은 생략해서 담당재판부로부터 승리를 얻는 일을 해야 한다.

결국 변호사는 상담과정에서는 의뢰인을 잘 설득해야 하며, 법정에서는 상대방을 설복시켜야 하고, 재판부로부터 승리를 승인받아야 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법률요리를 해야 하는 고충을 겪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초임변호사에게 가장 힘든 과정은 상담과정에서 의뢰인에게 법률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인듯하다. 법률적인 경험이 부족하여 의뢰인에게 적절한 답을 곧바로 던져주지 못할 때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명백한 하자임을 설명해 주어도 수긍하지 못하는 의뢰인을 볼 때마다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때마다 ‘음식남녀’에 등장하는 주인공 요리사를 떠올리며 한가닥 희망을 가지곤 한다. 한때 미각을 상실했던 요리의 달인이었던 그가 인생의 기쁨을 맛본 후 비로소 음식의 맛을 회복하게 된 것처럼, 법률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삶의 현장속에서 인생의 눈물과 땀방울을 나 자신이 직접 맛볼 수 있다면 언젠가 법률요리사로서의 모습을 보게 될 날도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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