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은 2020년에 개최될 도쿄올림픽으로 떠들썩하다. 1964년 제18회 하계올림픽 개최에 이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같은 지역에서 올림픽을 두번 개최하는 영광을 안아서가 아니다. 대회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인 엠블럼 디자인이 표절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4일 국내외 응모작 104점 중 최종 선정된 아트디렉터 사노 겐지로의 엠블럼 디자인이 도쿄올림픽 공식엠블럼으로 공표되었다.

하지만 선정 직후부터 이 엠블럼에 대한 표절의혹이 제기되었다. 벨기에 디자이너 올리비에 도비가 2년 전 자신이 발표한 극장 로고디자인과 이 엠블럼이 흡사하다며 작품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해당 엠블럼의 사용금지를 요구한 것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노 겐지로는 표절의혹을 적극 부정했고, 대회 조직위원회 역시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가 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공개한 디자인 원안 역시 타이포그라피의 거장 얀 치홀트 전시회 포스터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실제로 그 전시회에 다녀온 소감을 적은 그의 트윗이 알려지게 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얼마 전 겐지로의 엠블럼은 폐기되고 말았다. 근대화라는 거센 파도에 맞서 자신들의 전통을 비교적 잘 지켜내고 이를 현대에 접목시키던 창조적인 이미지의 일본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1964년 전통건축을 재해석한 요요기국립경기장 설계를 통해 단게 겐조라는 걸출한 건축가를 배출하고,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6팀이나 보유한 나라 일본. 하지만 일본은 지금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설계를 외국 유명건축가에게 맡기고 2651억엔이라는 사상 초유의 공사비를 들여 경기장을 건립하려는 욕망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흥미롭게도 이 유명건축가는 한 때 한국에서 엄청난 공사비로 논란이 되었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다. 최근 경기장 건립계획은 무산되었고 일본정부는 디자인을 재공모하기로 했다).

급속한 우경화 행보를 거듭하던 일본의 예견된 결과였을까? “일본이 밥솥을 개발하면 한국은 이것을 똑같이 만들고, 중국은 가짜밥솥을 만든다”라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되어 버린 걸까? ‘창작’과 ‘표절’사이, 그 메우기 힘든 간극에 대해 생각해본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표절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신 작가는 “우국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출판사 창비는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며 표절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작가와 출판사의 입장 발표 이후 비난은 더욱 거세졌고, 신 작가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 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금은 내 기억을 믿지 못한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표절의혹 제기 후 작가와 출판사의 반응이 도쿄올림픽 엠블럼 표절논란 때와 이상하리만치 흡사하지 않은가? 표절의혹이 불거지면 일단 부인하고 본 뒤, 여론이 악화되면 그제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가 분노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표절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표절’이라는 문제 자체에 대해서다.

타인의 작품을 표절한 당사자가 의혹을 부인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를 먼저 짚어보자. 신경숙 작가의 경우를 보면 그가 처음으로 밝힌 입장이 자신은 “우국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표절의 대상이 된 원작이 있고, 이를 표절한 작품이 있다면 우리는 이 둘 간의 연결고리를 표절한 작가의 자취를 통해 역으로 추적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혹은 아주 유사한 작품을 각자 창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우주 저편에 또 다른 지구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처럼,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과 몇 시간 뒤의 일도 예측하기 힘든 우리는 하찮은 인간인지라,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며 표절의 근거를 잡아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운이 좋으면 표절자가 원작자의 작품을 접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연결고리로 증명할 수도 있지만 이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논문의 경우 여섯 단어 이상이 일치할 때 표절로 간주한다거나, 음악은 가락, 리듬, 화음 중 곡을 구성하는 음표를 배열해 유사성 여부를 판단하기도 하는데, 표절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는 그 밖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므로 시시비비를 밝히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논문이나 음악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 외에 아직 뚜렷한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은 창작물이 태반이다.

표절 시비에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표절이 한 인간의 도덕성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는 ‘오마주’와는 달리, 표절은 원작자를 삭제해버린다. 자신의 지위를 방패삼아 잘 알려지지 않은 원작을 표절하는 사례가 가장 흔한 경우일 것이다. 사회를 위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 도덕이라면, 이 도덕을 얕보는 이는 대중에 의해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 인간이 표절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이 도덕성의 잣대를 엄격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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