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먹으면 금방 할 수 있는 숙제를 오후 내내 꾸물거리고 있다.’

‘부르면 못들은 척하다가 큰소리로 내면 마지못해 대답한다.’

‘심부름을 시키면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부린다.’

위 목록은 아이들이 부모 속 터지게 하는 대표적 행동으로서 심리학에서는 수동공격적(passive-aggressive) 행동이라 한다. 사람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할 때 화가 난다. 화가 날 때 어떤 방식으로든 화를 표현할 수 있다면 괜찮지만 우리네 삶에는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상황에서 화를 완전히 숨기거나 가라앉히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 나름 공격적 효과를 보는 것이 수동공격적 행동이다. 직접적 공격이나 간접적 공격이나 공격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간접공격도 화풀이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유머나 농담인척 하면서 상대방을 비꼬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가벼운 농담조로 얼버무려 표현하지만 실제 목적은 빈정거림으로써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정색하고 반박할 수가 없다.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어 웃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때로는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동공격이 직접 공격받은 것보다 더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심리학자인 사이먼(G. Simon, 2010)은 수동공격적 행동을 양의 탈을 쓴 분노라고 표현하며 적응과 대인관계 및 삶의 질에 있어서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했다. 특히 절대 권력자인 부모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입장에서는 대놓고 부모에게 화를 표출하기가 쉽지 않고, 부모가 시키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아이도 숙제는 당연히 해야 하고 집중해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숙제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다. 단지 지금 당장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부모가 시키니까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하라고 하니깐 하긴 해야겠는데 하기는 싫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숙제인데 신나게 할 리가 없다. 즐겁지 않으니 집중도 아니 되고, 오히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난다.

아이입장에서도 부모의 비판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다. 금방 할 수 있는 숙제를 오후 내내 붙잡고 뭉그적거리고 있다는 타박에 좀 늦게 하는 것뿐이지 숙제를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리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며 기분 나빠한다. 부르면 못들은 척하다가 큰소리로 내야만 그때야 대답한다는 지적에는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걸 가지고 야단치다니 억울하다고 항변하며, 결국 대답했지 않았냐고 반문하며 대든다. 심부름에 딴청을 부리지 말라면 그래서 심부름을 하지 않은 적이 있느냐며 우리 엄마 아빠는 나만 보면 괜히 트집을 잡는다고 입을 내민다.

수동공격적 행동은 일련의 변화 단계를 거쳐 수동 공격적 성격으로 자리매김한다.

입을 삐죽거리며 말대답을 하는 경우는 화가 난다는 것을 인식하고 말대답으로 미미하게나마 화를 표현하는 첫 단계로서 수동성이 공격성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 여기에 공격성이 증가하면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내 후회한다.

그 다음이 불만스런 표정이지만 울면서 잘못했다고 하는 단계이다. 공격성의 강도가 더 심한 상태가 되면 의식적으로는 아예 화 자체를 부정한다. 이때의 아이는 외적으로는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노의 활화산이 분출할 때를 기다리며 에너지를 모으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냉소나 빈정거림이 일반화되며 복수를 계획한다. 복수를 의식적으로 계획하지만 행동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수동공격적 단계에서도 계속 화를 우회적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수동성은 사라지고 공격성만 남게 된다. 사소한 일에도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공격적 성격으로 전이가 되는 것이다.

사이먼에 따르면, 아이가 부러 부모를 속터지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은 바람직하게 화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 부모를 약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을 삐죽거리며 말대답하는 행동은 부모가 아이의 수동공격적 행동을 초장에 알아채어 개입할 수 있는 중요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 덧붙여 수동공격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의 부모의 특성으로는 아이의 세세한 측면까지 통제하려는 경향성이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발달단계에 알맞게 시행착오를 경험하도록 해주고, 실패할 때 화를 건강하게 표현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그토록 얌전해 보였던 아이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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