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 도발을 한 북한과 우리가 마주앉았다. 오래 ‘협상’할 사안이 아닌데도 사흘 밤낮을 끌다가 합의문을 내놓았다. 그 2항이 논란이 됐다.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이걸 두고 국가안보실장과 통일부장관은 ‘북한이 직접 사과한 것’이라고 했다.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는 3항은 재발방지를 약속한 것으로 ‘의역’됐다. 그날 밤 방송들은 하나같이 북한이 사과했다는 두 분의 브리핑을 충실히 따랐다.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한 첫 사과라고 은근히 자랑하기까지 했다.

정말 이 합의문을 두고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한’ 문서로 믿었다면 두분은 국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것이다.

간혹 외교에서 ‘사과보다 강도가 약한 미안함’의 표시를 유감(遺憾,regret)이라고 표현하는 걸 암묵적으로 용인한다지만, 기본적으로 ‘유감’은 ‘섭섭함’의 표시이거나 ‘감정이 남았다’는 표현이다. 게다가 합의문에는 ‘지뢰폭발’이라고 북한과 관련 없는 사건처럼 표현하면서, 행위주체조차 명시하지 않았다.

정말 이것이 박 대통령이 말한 ‘사과’이고 ‘재발방지 약속’인가? 그렇다면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다. 아니나 다를까, 평양으로 돌아간 황병서는 지뢰 도발을 두고 ‘남측이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며 두분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이 문제는 절대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조간신문을 읽고 텔레비전 저녁뉴스를 보는 것으로 정치를 충분히 감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런가? 오히려 대중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정치적으로 철저히 조작(操作)되는 존재다. ‘민주주의가 소수의 지배엘리트가 벌이는 사기극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기극을 지휘하는 자는 누구인가? 우선 ‘사기극’이라고 규정하는 데는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인가? 대중이 현명하다면 사실 어떠한 선전에도 대중이 속을 이유는 없다. 또한 소수가 속더라도 다수에게 기망(欺罔)이 전염되지는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하나가 카오스이론(chaos theory)이다. 1961년 기상학자 로렌츠가 ‘나비효과’를 발표하여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브라질에서 한 마리 나비가 한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는 놀라운 이론이지만 사실 우스울 정도로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아놀드 토인비가 나비효과를 말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토인비는 진지하게 ‘알렉산드로스가 만약 평균나이에 죽었다면 그는 지중해와 인도 전역을 정복했을 것이고 뒷날 로마의 정복자들처럼 유대인을 탄압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랬으면 탄압과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열정적인 종교와 기독교는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원용해 볼프 슈나이더는 ‘카오스 이론처럼 모기 한 마리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말라리아에 걸려 32살에 권력의 정점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도하였던 것이든 우연이든 생산된 정보 하나가 한 인물을 ‘메시아’로 등장시킨다거나, 그 반대로 멀쩡한 정치인을 파락호로 만들어버린다거나, 한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 정보 생산에 해당하는 나비의 첫 날갯짓을 기획한 자나, 알렉산드로스를 물게 한 모기를 날린 자가 민주주의를 사기극으로 만든 배후다. 그가 텍사스의 토네이도를 확신했는지, 기독교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인과관계를 예측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중이 확신하고 있는 ‘실제상황’은 기실 막(幕) 뒤에서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형극이라는 사실이다. 사기꾼이든 정상배든 아니면 위대한 정치인의 참모든, 그는 어떻든 모든 상황을 조종한다.

그리고 이 배후조종자들은 철저히 사익에 따라 움직인다. 공익 목적으로 범죄에 가까운 편법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익이 개인의 이익이든, 혹은 소속한 집단의 이익이든 다만 그럴듯한 명분만 있다면 그 이익 앞엔 정의도 애국심도 아무런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배후조종으로 창출하는 인물이나 정책도 이념이나 정체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배후조종자가 어떤 정치세력에 속해 있든지 간에 말이다. 여론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배후조종자 역시 그들이 만든 여론이란 것에 기망 당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한 날갯짓이 불러온 토네이도인 줄 모르는 나비가 엄청난 회오리바람에 경악하다가 휩쓸리는 셈이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이 대개 언론인들도 ‘휩쓸리는 나비’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국가안보실장과 통일부장관이 대통령과 국민을 바보로 만든, ‘나비’가 아니길 간절히 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