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였던가 중학교였던가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국어 시험을 본 뒤 첫 시간, 국어 선생님이 한 이름을 호명했다. 국어 선생님이 그 이름을 기억할 리 없던 녀석인지라 온 교실이 어리둥절했다. 영문을 몰라 눈을 말똥거리는 우리 앞에서 선생님은 박장대소하시며 말했다. “아마 김영랑 선생이 네 말을 들으면 황당했을 끼다. 임마 내가 언제 ‘언어의 세탁’이라 가르치대? ‘언어의 조탁’이라 캤지.” 

그제야 우리들은 웃음보를 열었다. 그때 시험 범위에는 이 시가 있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언어의 조탁’과 ‘여성적 심성’이 특징인 영랑의 시의 특징에 밑줄 쫙 돼지꼬리 땡야를 했었는데, 그 ‘언어의 조탁’이 녀석의 답안지에는 ‘언어의 세탁’으로 현신했던 것이다. 깔깔대는 우리에게 선생님이 한 말씀을 덧붙이셨다.

“뭐 세탁이 틀린 거는 아니다. 김영랑은 우리 말을 그렇게 깔끔하게 써먹은 사람이니까.”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 영랑이 있다는 전언의 주인공…. 하지만 그의 시를 읊으며 정갈하게 다듬어진 시어에 취하고 운율에 맞춰 암송하는 호사는 일찌감치 내 소양과 능력 밖이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는 건 꽤 재미있다. 전라도 끄트머리 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강진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이후 서울로 올라갔고 휘문의숙(휘문고교) 재학 중 3·1운동을 맞이하여 만세운동을 위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신발 속에 숨겨 오다가 적발되어 6개월 감옥살이를 한다.

감옥살이도 감옥살이였지만 그는 14살 때 결혼했다가 15살에 홀아비가 되는 슬픔을 겪는다. 서울 유학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아내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뭘 알아서 결혼한 건 아니었겠지만 영랑은 두 살 위의 누나 같던 아내를 애틋해 했다. “쓸쓸한 뫼 앞에 호젓이 앉으면 마음은 가라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 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고 노래한 것처럼.

이후 영랑은 특이한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여덟살 연하이면서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열세살의 소녀였지만 훗날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었던 최승희였다. 요즘 같으면 미성년자 약취유인죄에 걸맞는 일이지만 그때는 조숙했던지 양쪽 다 열렬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집안 다 결사반대였다. 영랑의 집안은 타이즈 입고 온몸을 흔드는 ‘신여성’은 절대로 며느리로 들일 수 없었고 최승희의 집안도 강진 촌사람에게 딸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파토가 나고 영랑은 목을 맸다가 구출되는 등 파란을 겪는다. 혹자는 영랑의 대표작이라 할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모란이 바로 최승희를 이르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랑은 이 소싯적의 ‘모란’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로를 걷게 된다. 최승희는 극작가 안막을 만나 결혼한 후 세계적인 무용가로서 발돋움했다. 그 남편 안막은 최승희의 공연장에서 돈을 걷어 독립운동자금으로 쓴다는 후문이 있었을 정도의 인물이었고, 해방 후 최승희는 좌익이었던 남편을 따라 북쪽을 그녀의 조국으로 택한다.

영랑은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즈음의 영랑의 시는 절대로 여성적이지 않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毒)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는 시를 보면 손 대면 베일 듯한 기운이 가득하지 않은가. 언어의 ‘세탁’ 따위는 더더욱 없었고.

옛 여인이 택한 것과는 달리 그는 철저한 우익이었다. 하지만 멋있는 우익이었다. 일제에 빌붙어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를 부르며 가미가제를 찬미한 미당도 우익이었고, ‘그대들이 나라의 앞잡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여바칠 반도의 남아’라며 일제 지원병 가라고 선동하던 모윤숙도 우익이었지만 영랑은 그들과는 많이 달랐다. 일제에 빌붙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을 때는 아예 붓을 꺾으며 저항했다. 카르멘의 투우사의 노래를 원어로 부를 줄 알았고, 명창들이 극찬할만큼 북도 잘 쳤던 그는 실로 대한민국에서 드물게 보는 떳떳하고 당당한 우익이었다.

대한민국 신생 정부의 공보처 일을 맡아 보던 그는 전쟁 발발 후 서울을 떠나지 못한다. 인공 치하 3개월을 성공적으로 버틴 그는 마침내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숨어있던 집을 나선다. ‘찬란한 슬픔의 봄’ 아닌 지옥같은 공포의 여름을 끝낸 뒤 찾아온 기쁨에 ‘워메 단풍 들겄네’를 부르짖고 싶었겠으나 그는 너무 성급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가전 와중의 유탄에 맞아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1950년 9월 2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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