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 상이군인들이 구걸하러 다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거지들이 나라를 지키다가 다리를 잃고 팔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거지로 살아갈 때는 나라도 거지꼴로 살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이 땅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영화 ‘명량’을 보면서 1600년대의 아픔을 짐작하였듯이 6·25사변을 놓고도 우리는 역사적인 존재들을 자칫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감기몸살을 걱정하는 사람일지라도 남북이 대립하는 전선에서 잘려나간 청년의 발목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약한 우리들을 자책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문제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기쁨이 살아나고 슬픔은 묻혀 갑니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이 된 날 나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 슬픔과 기쁨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슬픔과 기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한 세대가 살다 죽고 나면 그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살다 돌아가기 때문에 이 땅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의 작은 할아버지는 일본의 징용으로 끌려가서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던 길에 죽었습니다. 태평양전쟁유족회로부터 집으로 오던 우편엽서들은 나의 중학생시절부터 변호사를 개업하고 15년이 지난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몇년 전 ‘일본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의 저자를 상대로 피해자들을 대리하여 무료변론을 진행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그 위자료를 집행할 방법을 찾다가 속절없는 시간만 흘렀습니다.

우리는 1950년부터 남북이 겪고 있는 아픔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북한 땅에는 얼마나 많은 국군포로들이 생존하고 있을까요. 1994년경 북녘 땅을 스스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던 조창호 중위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저 평범한 삶에 매몰되어 있는 동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시간을 타고 퇴색되어갑니다. 마치 첫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 칠순을 맞는 느낌입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집회가 열리는 소식을 듣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던 시절에 일본순사가 데려가는 소녀를 동네어른들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름이 위안부(慰安婦)인데 그들의 아픔은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꽃 피던 봄날에 고향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였는데 저녁 무렵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가족들이나 동네사람들로부터 위로받을 용기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험난한 인생여정을 마칠 때 모든 회한만이 그들의 앞을 캄캄하게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고통당하였던 종군위안부들의 아픔을 우리가 보듬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임을 일본에게만 넘기고 사과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만을 전달할 때가 아닙니다. 먼저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피해자를 위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대한 사과요구는 본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사과를 몇 번 들으면 마음이 풀릴까요.

우리는 피해자들의 가족들이요, 같은 국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살피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공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합니다.

정부가 이를 해결할 마음이 없으면 국민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정부에서 그곳에 쓸 돈이 없다고 한다면 국민이 돈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참한 마음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가 무력감에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할머니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국민이 하나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응어리지고 참담해진 마음들을 깨끗하게 풀어줄 힘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원합니다. 법을 만들고 재정을 사용하고 재단을 형성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모습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도자를 바라봅니다. 힘들고 응어리진 삶을 짊어진 채 돌아가시는 위안부 할머니, 북녘 땅에 고립된 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국군포로들 그리고 국방의무를 다하다가 발목을 잃은 청년들은 우리가 보살펴야 할 고귀한 영혼들입니다.

나는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행할 힘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국민의 위로자가 정부나 국회에 없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머물고 있을까요. 인생의 저녁노을에서 위로받을 사람이 있다면 나라는 그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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