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극장가에서 영화 ‘베테랑’이 인기를 끌고 있다. 권선징악의 단순 명쾌한 스토리, 관객들을 피식거리게 만드는 소소한 웃음 장치 등 여러 가지 비결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극중 악역인 재벌 2세 조태오의 캐릭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영화는 반사회적 성향의 재벌가 자제 조태오가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화물차 기사 폭행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를 덮으려는 오너 일가와 그의 범행을 밝히려는 형사 서도철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흔한 선악 구도에서 주인공보다 악역이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선 조태오를 맡은 배우 유아인의 열연이 인기의 한 요소가 되고 있다. 유씨는 이번 영화에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안하무인의 재벌가 2세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배우들 사이에서는 “제대로 된 악역이 주인공보다 낫다”며 악역을 선호하는 배우도 있다고 한다.

연기 뿐 아니라 어떤 영역이든 프로페셔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현실에서도 해킹 등 IT·금융 관련 범죄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범죄자들이 죗값을 치르고 제도권으로 영입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영화 속 조태오가 현실의 누군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가장 근접한 인물은 2010년 ‘매값 폭행’ 파문을 일으켰던 물류업체 M&M의 전 대표 최철원씨다.

SK 최태원 회장의 사촌이기도 한 최씨는 2010년 10월 인수합병 과정에서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화물연대 소속 탱크로리 기사 유모 씨를 집무실로 불러 야구 방망이로 때렸다. 검찰은 ‘매값’으로 대당 100만원씩 20대를 때리고 유씨에게 회삿돈 2000만원을 건넨 혐의(상해·업무상 횡령)로 최씨를 구속기소했다. 최씨는 피해자 유씨가 10대를 맞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는데도 20대를 끝까지 때린 것으로 조사됐다.

영화 속 조태오도 자신의 집무실로 화물기사를 부른 뒤 협력업체 사장을 시켜 폭행하고 그 대가로 수표 서너장을 건넨다.

조태오가 협력업체 사장과 화물기사에게 권투 글로브를 끼고 서로 때리게 하는 장면은 2007년 김승연 한화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김 회장은 차남이 유흥주점 종업원과 시비가 붙어 다치자 종업원들을 청계산 공사장으로 불러 내 쇠파이프 등으로 때린 혐의로 기소됐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김 회장이 주점에 아들을 데려가 권투 글로브를 주며 종업원을 때리라고 했다는 목격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영화에서 감독이 의도한 장면들은 이런 ‘사회적 기억’과 중첩되면서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반대로 가상 현실이 주는 만족감도 있다. 점차 극악으로 치닫는 조태오를 보며 관객들은 그의 파국을 예상한다. 악역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자기 파괴, 외형적 몰락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관객들에게 현실 세계에 대한 대리 만족과 정의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베테랑과 비슷한 부류의 영화 후반부에는 반드시 주인공과 악역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주인공이(인권 감수성이 풍부해야 할 경찰, 검사인데도) 악역을 흠씬 두들겨 패며 끝이 나곤 한다. ‘왜 모든 악역은 이토록 맷집이 좋은가’ 싶을 만큼 악역은 꾸준히 되살아나 주인공을 공격하고, 다시 맹렬히 얻어 맞는다. 이는 현실의 결말을 향한 대중들의 강한 불만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 문명 세계에서 가장 명료한 정의의 사도는 사법부다. 구성원들의 노력과는 달리 우리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낮은 편이다.

최근까지도 재벌 총수들과 관련한 판결은 ‘3.5 법칙(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등으로 불릴 정도로 솜방망이 처벌이 많았기 때문이다. 앞선 최철원씨의 경우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서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다. 공교롭게도 그보다 3년 앞서 선고 된 김승연 회장과 1·2심 결과가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기업 활동과 무관한 개인 범죄였는데도 말이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영화를 보며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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