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김태현 변호사님(1923년생, 조선변시 3회)이 돌아가셨다는 메일이 서울회에서 왔다. 이렇게 원로 선배가 돌아가시면 내가 ‘그 추모의 글을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무감이 든다.

그 의무감은 다분히 김이조 변호사님(1927년생, 고등고시 3회)의 열정에 기인한다. 지난번 돌아가신 임갑인 변호사에 이어 김태현 변호사에 대해서 회원들에게 추모글을 써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인이 된 선배님들에 대해 글을 쓰면 간혹 원로 회원들의 격려의 전화를 받는다. 일본 사람들이 많은 기록과 자료를 남기는 것에 비하여 우리는 너무 자료가 부족하다.

김태현 변호사님의 경우에도 법률신문의 법조인대관 자료이외에는 자료가 별로 없었다. 원로 선배들이여!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들을 위하여, 혹은 법조계의 기록을 위하여 자서전을 남겨주시기 바란다.

우재(愚齋) 김태현. 법조인대관에는 우제(愚齊)로 나오는데 오기로 보인다. 우재는 율곡 이이의 호이기도 하다. 중앙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를 졸업(1950년)하였고, 졸업전인 1949년 제3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고향은 전남 정읍이고, 1957년 전주지방법원판사를 시작으로 1980년 대법원 판사까지 하였다. 그 당시는 대법관의 호칭이 대법원판사로 강등(?)된 시절이다. 법관의 꿈인 대법관이 되었는데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1년만에 변호사가 되었다. 대법관과 대법원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중하차 한 경우가 헌정사상 4번이 있는데 1980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7명의 대법원판사가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안해서인지 전두환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81년 청조근정훈장(대통령)을 주었다.

변호사활동을 하면서 1998년에는 수필집 ‘생사(서울출판사)’를, 1999년 18년간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직접 대법원에 제출했던 89건의 상고이유서 및 답변서들을 엮은 ‘상고이유서’를 출판하였다. 수필집 생사를 보면, 그의 인간적인 면을 좀 볼 수 있을까 찾아보았으나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 상고이유서란 고인의 책을 보면서, 모든 판사들의 꿈인 대법관이 되었지만 1년만에 황망하게 물러서야 했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원로선배의 아쉬움이 나에게는 읽힌다. 어찌되었건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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