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퇴근길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이 대목이 별안간 마음 깊숙한 곳을 찔렀다.

그날이 그날 같으면서도 마음은 전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고 어지럽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갈망하거나 열정을 품는 것도 없다. 인류의 고통은 너무 멀고 연민은 파지(破紙)로 가득 찬 손수레가 지나갈 수 있게 차를 멈추고 노인의 굽은 등과 앙상한 팔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에야 찾아온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필요한 정도로만 판례와 법리를 찾아보는, 딱 그만큼의 수준이다. 거센 바람에 몸을 맡기거나 깊은 고뇌로 밤을 지새우기엔 심신이 너무 피로하고 노쇠하다.

그런데 그날 자서전 프롤로그를 듣고서 나는 강렬한 열정이 지배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불현듯 흥미가 일었다. 대충 수학자요 철학자라고만 알고 있던 버트런드 러셀을, 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본래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은 그가 95세이던 1967년에 1부(1872~1914)가, 1968년에 2부(1914~1944)가 출간되었다. 3부(1944~1967)는 그의 사망 전 해인 1969년에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사회평론이 작년에 한권으로 합본해 ‘인생은 뜨겁게’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하였다.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은 그의 98년에 달하는 긴 생애와 그간의 업적만큼이나 상당히 두꺼웠다. 피곤에 지쳐 돌아온 저녁이나 무기력하게 늘어진 주말에 책을 들라치면 그 무게감이 먼저 와 닿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책을 붙들고 천천히 끈질기게 책장을 넘기었다.

때로는 그의 명석함을 시샘하고, 때로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부러워하며 또 때로는 그의 공연한 자기 자랑에 얄밉지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랬다. 그의 삶은 아무리 자기 자랑을 해도 결코 충분하지 않을 삶이었다.

그는 조부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수상을 두 번이나 역임한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도 백작의 신분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고, 스승이자 선배이기도 한 화이트 헤드와 ‘수학의 원리’를 집필한 것을 비롯해 수학과 철학 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모교와 하버드 등에서 강의를 맡았고 비트겐쉬타인 같은 이름난 학자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었다.

생전에 영국 정부로부터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78세에는 노벨 문학상도 수상하였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그의 인생은 화려하고 대단한 것이었다고 하기에 정녕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게다가 남들이 한 번 감당하기도 벅차하는 결혼을 그는 무려 네 번이나 하고 세 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간간이 혼외 연애를 즐기기까지 하였다.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 볼 때 느끼는 무섭도록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고 하지만 이런 사생활 때문에 그는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의 결혼관을 놓고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여성참정권을 옹호하였고 자녀를 양육하는 전업주부에게는 국가가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여성을 단순히 쾌락의 도구나 열등한 존재쯤으로 인식하는 부류와 그를 동일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그의 삶에서 사랑에 대한 열정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출발점으로 삼았던 순수 학문의 상아탑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류가 스스로 쌓아올린 지식 때문에 자멸을 초래하지 않도록 평생 반전 반핵 운동의 전선에 서 있었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 자격 박탈, 투옥 등의 곤경도 개의치 않고 사회개혁과 인류평화를 위해 현장을 뛰어다닐 때, 그의 나이 40대였다. 당시의 평균 여명을 생각하면 40대 후반쯤에는 그동안 이룬 것에 자족하며 한걸음 물러나 앉았음직도 한데 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하기에 40대가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임을 그의 전 생애가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연보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40대 이후에 그가 한 일을 다시 살펴본다. 그리고 되새긴다. 나이는 변명이나 핑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정해진바 없는 변호사의 정년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이 결정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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