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조선변호사시험이 있었다. 14일 오전 민법, 오후 형법, 15일 오전 상법, 오후 경제학이었다. 그런데 15일 오전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 200여명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시험 자체가 영구히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수험생들은 논의 끝에 합격증서를 받기 위한 교섭을 벌이기로 하고, 이른바 의법회(懿法會, 일명 以法會)를 조직한 후 “시험 중단의 책임은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 시험위원회에 있다. 시험을 끝까지 시행했다면 전원이 합격했을 수도 있으니 응시자 전원에게 합격증서를 달라”고 요구했다. 시험위원회는 여덟 과목 중 세 과목밖에 치르지 못한 수험생들에게 합격증서를 줄 수 없다고 거부하다가 결국 연락이 끊긴 사람을 제외한 106명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주었다.

이것이 광복 후 변호사가 탄생하는 장면의 하나였다. 당시 미군정청의 현안은 치안유지였고, 이를 위해서는 사법기능이 작동해야 했는데, 문제는 판사, 검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시대 변호사 자격자는 물론이고 전문학교 출신으로 7년 이상 법원서기로 근무하였으면 하루에 100명, 200명씩 미군정장관의 결재를 받아 신문에 보도하는 방식으로 판사를 임용하던 시기였다.
광복 70년, 사법시험 존치 국민토론회, 희망의 사다리 등 최근 일들에서 연상된 것이 70년 전 사법의 옛 장면이었다.

우리 법조인양성제도는 크게 네 단계로 변화하였다. 광복 후 1962년까지의 사법관시보 시기, 1962년~1970년의 사법대학원 시기, 1971년부터 시작된 사법연수원 시기, 현재의 법전원 시기다. 사법관시보제도는 일제시대의 시보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고등고시 사법과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사법관시보나 변호사시보로 임용하고, 실무기관에서 도제교육을 받게 한 후 고시에 합격하면 판사, 검사로 임용하거나 변호사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이 동지가 되는 ‘고시동지회’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사법관과 변호사 자격이 분리되었고, 교육도 별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법조일원화와는 거리가 먼 제도였다.

지금 법조일원화는 변호사 중에서 판사, 검사를 임용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이 시기에는 사법관과 변호사 양성을 일원화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사법시험과 사법대학원이었는데, 이론, 교양 중심 교육에 대한 실무계의 비판으로 사법연수원이 사법대학원을 대신하게 되면서 사법연수원 시대가 열렸다. 이렇듯 사법시험은 법조일원화의 산물이지만 고등고시 사법과를 계승한 것이었고, 그 본질은 국가에 의한 사법관 관료의 선발이었다. 이 시기 변호사의 양성은 제도만으로는 사법관 양성의 부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흐름은 연수원 시대에도 이어졌다.

내가 판사로 임용된 후 기회 있을 때마다 판사를 존중하는 이유를 물었던 시기가 있었다. 변호사든 일반인이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한데다 연수원 성적도 우수했으니 동년배 중 가장 똑똑한 사람들 아니냐 ?”하는 답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관존민비와도 맥을 같이 하는데, 이것이 사법시험과 연수원 시대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의 기초였다. 그 귀결은 법조를 특권화하는 사회현상으로 나타났고, 이를 위해서는 법조인은 소수그룹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그 연장선에는 전관예우, 판사와 검사의 소수지향성 등등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경제학자와 일부 법학교수였다. 1994년 구성된 세계화추진위원회는 로스쿨제도의 도입을 꾀하다가 기성 법조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자 법조인 증원과 변호사보수 적정화, 전관변호사의 형사사건 특별관리 등의 차선책을 선택하였다. 세추위 사법개혁의 목표는 국민의 사법복지를 증대하기 위한 법조특권의 폐지였고, 그 원리는 지극히 간단한 수요공급의 법칙이었다. 법전원은 이런 역사적 변화의 산물이다.

지금 상황에서 정책적으로 사법시험 존치가 타당한지를 따지려면 더 많은 논점이 다루어져야 하고, 사시존치론의 타당한 논거는 여전히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희망의 사다리, 인생역전, 개천에서 용 난다’는 구호에서 ‘희망, 역전, 용’은 법조특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전관예우를 극복하려는 생각과 희망의 사다리 구호가 지향하는 바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