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이 돌아왔다. 내가 출입하는 서울중앙지검의 검사들도 조심스레 달력을 들춰보며 휴가 일정을 고민하고 있다. 검찰총장 등 윗선에서 솔선수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검사들이 휴가를 선뜻 떠나기 어려운 구조다. 업무 특성도 있고 검찰 조직 안팎의 분위기도 작용할 것이다. 한 인지부서 검사는 “주말도 반납하고 일 하는 마당에 휴가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휴가를 떠나는 검사들도 길어야 사나흘 일정으로 다녀온다고 한다.

사실 서초동만 이런 것은 아니다. 일반 기업에 다니는 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학교 교사인 친구도 “요즘엔 방학 때도 방과후 학교와 각종 연수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고 푸념한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일터에서 휴가 계획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당장 격주로 일요일에 출근해 취재원들에게 전화를 돌려야 한다. 보통 기자들은 달력의‘빨간 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한다. 휴일에 전화하면 “예의없다”며 ‘버럭’하는 취재원이 간혹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의 흔치 않은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일 아침 그들이 볼 신문을 만들고 있다’며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이런 내가 곧 다가올 휴가를 떠올리며 휴식과 여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국의 석학 버드란트 러셀은 그의 짧지만 강렬한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여가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러셀에 따르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놀아야 행복하고 즐겁다. 노동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해야하는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에 하루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인간은 노동을 줄이기 위해 생산설비를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8시간 노동을 해야 일정량의 핀을 만들 수 있었던 공장에서 생산설비 향상으로 절반만 일 해도 같은 양의 핀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현대인은 노동 시간을 줄이기보다 노동자 수를 줄였다. 그래서 누군가는 여전히 8시간 일하고, 절반은 완전히 노동에서 배제된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루에 4시간만 일하자! 모든 사람이 4시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여가에 사용한다면 소비를 촉진해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란 논리다. 노는 시간에 인류를 진일보하게 할 학문과 예술도 발전할 것이라고 봤다. 러셀은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사회에서 노예의 도덕은 필요치 않다”면서 “내 책을 읽는 YMCA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보라’고 선량한 젊은이들에게 캠페인을 해달라”고까지 했다.

이런 유토피아적 발상의 밑바탕에는 절박함이 깔려있다. 러셀이 이 글을 발표한 때는 1935년이다. 당시 유럽은 1920년대 대공황과 1·2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경제 위기와 정치적 불안감이 극에 달한 때 ‘놀아야 산다’는 외침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 하는가, 일 하기 위해 사는가를 돌아보라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지만 그만큼 바빠졌다. 디지털 혁명이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고 있지만 그에 맞춰 노동도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바쁘고, 여유가 없다.

더욱이 성실하고 근면한 한국인들은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자아실현 하는 것을 중시한다. 일에 헌신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스스로의 사회적 가치를 매기는 경우가 많다.‘일 중독’이 심해지면 일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된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면 일에서 배제된 실직자나 미취업자들은 사회적 가치와 존재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사람이 돼 버릴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피로감에 젖어 있고 모든 연령대에서 자살이 주요 사망 원인으로 부상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 아닐까 싶다. 여가를 통해 ‘나’에서 ‘일하는 나’의 비중을 덜고 가족·친구와 함께하는 나, 혼자라도 즐거운 나를 조금씩 늘려가면 삶이 지금보다 다채로워질 것이다.

다행인 건 한국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캠핑이나 육아 등 가족과 함께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등산·자전거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들도 늘고 있다. 내가 속한 회사는 ‘집중 휴가제’라는 제도를 운영하며 2~3주씩 휴가를 가도록 독려하고 있다. 아직 도입 초기지만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만족하고 있다. 모 신문사 남자 동기는 용감하고도 훌륭하게 육아 휴직을 다녀왔다고 한다. 앞으로 러셀의 구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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