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연구소에서는 정기적으로 이메일링 서비스를 해 준다. 물론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얘기다. 최근 박석무 이사장이 보낸 내용은 매심(每心)에 관한 것이다.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자신들의 서재에 이름을 달았다. 정약용은 자신의 서재를 ‘여유당’이라고 하였고, 정약전은 ‘매심재’라고 불렀다. 정약전이 ‘매심’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풀이했다고 한다. “매심(每心)은 글자를 합하면 ‘회(悔:후회하고 뉘우침)라는 글자가 되니 잘못을 후회하며 뉘우치는 삶을 살아가려는 뜻”이다.

문득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소송건이 생각이 났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의뢰인이 찾아왔다. 배우자가 뜨거운 물을 얼굴에 부은 모양이다. 보기에도 심했는데, 화상병원에서 치료는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화상병원에 누워 있었을 때예요. 저 말고도 다른 환자들도 있었어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혼자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느꼈어요. 그 전에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거든요.”

지금도 그 말을 생생히 기억하는 건, 심하게 화상을 입은 입에서 나온 말이 “감사”였기 때문이었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담긴 말이었으면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송이 시작되었다. 소송도중에 그 의뢰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배우자가 본인에 대하여 느꼈을 감정에 대하여, 본인이 배우자에게 잘해주지 못한 점에 관하여 차분하게 써 내려간 편지였다. 의뢰인의 편지를 몇 번이고 연달아 읽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린 의뢰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더 이상 없었다. ‘아! 사람이 이럴수도 있구나. 이분은 보통분이 아니구나’ 하는 경외감이 일었다. 두고 두고 그 때 일을 잊을수가 없다. 의뢰인의 글속에는 매심(每心)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잘못을 후회하며 뉘우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논어에는 증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증자가 말했다.

“나는 매일 세가지 측면에서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면서 충실하지 않았는지? 친구와 교제하면서 미덥지 않았는지?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면서 스스로 익숙하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충실해야 한다는 글을 대할 때마다, 가까운 사람에게 충실해야 하고, 신뢰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읽을 때가 많다. 가까운 사람은 ‘가까우니까’ 소홀히 대하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고교동기가 연락이 왔다. 말이 고교동기이지, 나이는 10년을 더 먹은 형이다. 10년이나 어린 우리들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형은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한 모양이다. 이제야 당시 힘들었던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선생님들의 격려가 많은 힘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교장선생님이 이래저래 편의를 많이 봐 준 모양이다. 형은 참 착하다. 그래서 늘 교장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에 죄송해 한다. ‘스승의 날’에는 꼭 교장선생님에 대한 안부를 잊지 않는다. 상품권을 손수 챙겨 보내드리는 모양이다. 이를 받은 교장선생님이 부리나케 연락을 하신다고 하였다. “너가 무슨 돈이 있어 이런 것을 보내느냐. 다시 보내마.” 그렇게 일년에 한번은 반드시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벌어지는데, 올해는 아무 연락도 없으시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책상 위의 핸드폰 진동벨이 계속 울려댄다. 형의 전화다.

“수영아. 교장선생님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연락하기가 그렇고, 너가 연락을 한번 해봐라. 분명 어딘가 편찮으신 모양이야.”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다. 사모님이 받으셨다. “응. 수영이! 선생님이 아프셔. 못 걸어요. 나도 아프고.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러제.” 선생님은 거실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계신다고 하였다.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하기를 원하셨다. “저 수영입니다. 선생님.” “어찌 내가 너를 잊겠냐.” 그 한마디에 선생님의 온마음이 전해왔다. 옛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충실한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신 분이다.

사무실의 내 방도 ‘매심재(每心齊)’라고 부를까 싶다. 매일매일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곳. 마음의 때를 매일 매일 벗기는 곳. 어디 매심재가 따로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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