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변호사 시절. 그러고 보니 10년도 더 지났다. 이혼사건을 맡아 나름 재판상 이혼사유를 꼼꼼히 정리한 소장을 제출했다. 이혼사유는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피고는 이혼을 원치 않는다고 버텼다.

조정기일이 지정되었다. 그런데 피고측 대리인인 변호사님 왈. “존경하는 재판장님. 무릇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어찌 인간이 풀겠습니까. 피고는 이혼을 원치 않습니다.”

어라? 이건 뭐지? 변호사님인지 목사님인지. 황당했다. 조정은 결렬되었고, 이후로도 피고 대리인의 신념은 확고한 듯 했다.

나는 그 변호사님이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반대하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분인가 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 후 맡은 이혼사건의 원고 소송대리인이 앞에서 본 그 목사님인지 헷갈렸던 그 변호사님이었다.

이번에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피고의 귀책사유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이혼판결을 구한다고 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사안을 두고도 내 의뢰인이 원고 또는 피해자인 경우에는 그 입장에 맞추어 공격논리를 구성했고, 내 의뢰인이 피고 또는 가해자인 경우에는 또 그 입장에 맞추어 방어논리를 구성했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법조인으로서 자존감만은 잃지 않으려 애써왔다. 논리와 상식에 반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의뢰인에게는 “참으로 놀부 심보시군요. 그건 아니지요”라고 당당히 말해왔다.

그 결과 사건을 맡기려고 왔던 상담자들이 발길을 돌리면 오히려 직원들이 “변호사님. 사무실 운영하셔야죠. 제발 그 ‘놀부 심보시군요’라는 말씀 좀 하지 마세요”라며 걱정했다.

“우리의 핵심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올해 5월 12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하신 말씀이다.

흠…도대체 무슨 뜻일까. 나와 같이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던지 SNS에서는 대통령의 말씀을 독해해주는 번역기까지 등장해서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전 새누리당 의원 성완종씨의 뇌물 파문으로 정국이 어수선하더라도 올해 최우선 국정과제로 꼽은 경제 활성화에 정부 역량을 집중하라는 주문으로 풀이된다고 한다. 아이고. 그런 뜻이었구나. 그런 깊은 뜻이….

그런데 나의 바람은 설령 번역기가 동원돼야할 말씀이더라도 대통령께서 이 정도 말씀만 해주셨으면 한다.

차라리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듣는 것이 낫지 과거에 당신이 한 말씀을 식어빠진 빈대떡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뒤집어엎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은 아무래도 좀 섬뜩하다. 우리 앞에 있는 대통령이 도플갱어가 아닌가 섬뜩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혹여 불치의 기억상실증을 앓고 계신 것은 아닌지 너무나 염려되기 때문이다.

우리 대통령께서는 2004년 김선일씨가 알 카에다에 납치되어 피살되었을 때 고 노무현 대통령을 이렇게 추궁하셨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우리국민 한 사람을 못 지켜낸 노무현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생명의 귀중함은 그 머릿수로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국민 한 사람을 못 지켜낸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자격이 없다며, 용서할 수 없다며 일갈하신 분이 세월호가 침몰될 때,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가라앉을 때 두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한 본인은 왜 그리 쉽게 용서하시는지.

대통령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논리적 오류는 없다. 하지만 누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에 따라 유체이탈 화법의 전형이 될 수 있다. 이 말씀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대통령께서 지난달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며 하신 말씀이다. 당신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이번 국회법 개정안보다 더 강제력이 큰 국회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했었던 기억을 못하고 계시는 것 같다.

우리 대통령께서는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신다고 한다. 동물은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자꾸만 기억력이 쇠퇴해 가는 것만 같은 대통령께서 ‘왕국의 동물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잘못 하신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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