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백조(白鳥)’를 아는가. 그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검은 백조’란 우연에 의한 돌발적 사태 즉 예측불가능으로 인해 생긴 이상 현상을 말한다. 요컨대 미래의 불확실성이 검은 백조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세상에 한번 나타나면 기존의 ‘질서의 문법’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저 불확실성에 순응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지도 모른다. 따라서 검은 백조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예측 불가능성, 불확실성을 종종 잊은 채 살고 있기 때문에 검은 백조에 놀랄 뿐이다.

그런데 우스운 일은, 검은 백조가 나타나면 누구나 ‘실은 그것은 예측 가능했었다’라고 말한다는 것. 이미 지나간 일을 뒤돌아볼 때 인간은 누구라도 신(神)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이든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사람이 ‘나만은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 어리석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금 우리 재야 법조에 나타난 검은 백조의 이야기를 해 보자.

지금 변호사 사회는 대폭 증가한 변호사의 수를 놓고 큰 혼란에 빠져있다. 변호사의 대폭증가라는 검은 백조 때문이다. 모두 놀란 나머지 ‘변호사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얘기를 입에 달고 있다.

그러면 정말로 변호사의 대량증가는 예측 불가능한 검은 백조이었는가.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었던 일이다. 세상이 다 알 수 있도록 공표된 일이었으니까. 불확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확실성의 문제였다. 다만 우리가 무능하고 나태하고 게다가 교만해서 알고도 그저 손 놓고 있다가 오늘을 맞이했을 뿐이다.

그러면 변호사의 대폭적 증가는 어찌해서 이루어졌는가. 이른바 ‘독점의 논리’안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업무영역은 국가 형벌권에 의하여 보호된다. 변호사 아닌 사람이 변호사의 업무를 수행하면 그 행위는 변호사법 위반으로서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가. 우리는 국가형벌권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서 ‘희소성(稀少性)’이라는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 작은 행복이 우리로 하여금 사회의 한 구석에 법률서비스의 공백 즉 정의의 공백이 생기는 것을 방치하게 했다. 국가는 그 공백을 방치하지 않았다. 그 공백을 메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유사(類似) 법률직의 창출이고 다음은 법조인구의 대량증원이다. 이런 방법에 의해 ‘희소성의 해결’을 도모했다. 그 결과 이제는 변호사 사회가 ‘과잉성(過剩性)의 처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말았다.

지금 변호사는 희소성을 과거의 영광이라고 믿고 있는 한편 과잉성을 몰락의 전조쯤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영광과 몰락의 예감의 틈바구니에서 변호사의 수를 줄이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지극히 순진하고 단순한 목적주의에 경도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이 옛날과 같은 영광을 누리는 마치 제국적(帝國的) 영광으로의 회귀인양 생각한다. 그야말로 ‘꿈이여 다시 한번’인 것이다.

그러면 변호사의 수를 과연 줄일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하여는 지금의 과잉성이 희소성 해결의 방법적 실패이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용렬함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또 얼마나 줄이면 변호사가 지금의 잠재적 과잉성의 공포에서 벗어나 ‘꿈이여 다시 한번’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변호사 사회 내부의 허망한 내향적 논리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변호사는 이 내향적 논리에서 과잉성 이후에 오는 자기해체의 길이라는 악몽을 본다. 때문에 더더욱 희소성과 독점이라는 변호사 사회의 상징논리(象徵論理)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논리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장래에 대한 공포에서 생긴 과거의 이상화(理想化)라는 집단 환상일 뿐이다.

영토(업무영역)의 확장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것 아닐까. 이 수다한 식구가 지금의 이 대경쟁(Mega-Competition)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호사는 지식으로서는 그 길을 알고 있어도 몸으로 체감하는 감각상의 통증(痛症)으로서는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저 검은 백조를 탓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 개명 천지에 무슨 대팽창주의라는 구시대적 발상을 말하는가’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지나친 영역의식(領域意識)은 변호사를 동물적인 세력범위의 환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나무람도 비난도 모두 감수한다. 다만 검은 백조를 머리에 떠올리며 겪는 정신의 굴절과 자학만은 극복하자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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