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쯤이다. 어느 잡지에서 춘향전에 관한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 정절과 기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춘향이가 사실은 철저한 손익계산에 따라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밝힌 글쓴이는 ‘당장은 힘들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수청을 거부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주장했었다.

변 사또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당장은 편할 수 있겠지만 기껏해야 2년 정도인 지방 고을수령의 임기를 생각하면 버티는 것이 긴 인생에서 보자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춘향이는 기개와 정절의 상징이라기 보다 나름 영악하고 계산이 빠른데다 목숨을 건 배팅까지 할 수 있는 배짱있는 여성이라는 분석이다.

‘춘향전’에 따르면 춘향은 퇴기(退妓) 월매의 딸이다. 아버지는 남원 고을에 사또로 부임했던 어떤 고위관료라고 한다. 그러니까 춘향은 ‘반쪽 양반’인 셈이다.

월매는 춘향이가 반쪽이기는 하지만 양반으로 살기를 원했고, 춘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었던 이 도령이 춘향이를 버리고 떠나면서 ‘반쪽 양반’ 행세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거다.

이런 상황에서 변 사또의 요구를 덥석 받아들인다면 춘향이는 어떻게 됐을까? 시쳇말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지방수령의 임기는 기껏해야 2~3년이었다. 달리 말하지만 변 사또 역시 2년 뒤에는 춘향을 떠났을 것이란 말이다. 이 도령에 이어 변 사또까지 춘향을 버리게 된다면 그 다음 이야기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모친인 월매와 같이 퇴기(退妓) 신세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진심이야 어떻든 ‘이 도령을 기다리겠다’고 버티는 것이 낫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다.

설령 감옥에 가더라도 2년여만 버티면 된다는 계산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몸이라고 해도 ‘반쪽 양반’으로서의 삶은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출세한 이 도령이 돌아와 가정을 꾸리는(비록 소실일 지라도) 인생역전도 기대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목숨을 건 배팅을 할 만하지 않겠나?

문학작품을 가지고 이게 무슨 발칙한 상상이냐 싶은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다지 불합리한 결론은 아니라는 점에는 대체로 공감이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최근 검찰은 82일간 계속해온 ‘성완종 리스트’ 수사를 사실상 마무리지었다. 노건평씨 부분만 빼면 대체로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나온 듯 하다.

검찰의 수사결과에 여론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권력핵심부나 실세는 모조리 빠져 나갔다는 지적이 빗발친다. 리스트에도 없던 노건평씨가 포함된 것에 대해서는 ‘기-승-전-노무현’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여권이 수세에 몰릴 때마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물고 늘어진다는 것을 꼬집는 표현이다.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하지 못했다는 노씨 사안을 검찰이 상당한 시간에 걸쳐 공들여 설명했다며 의혹을 감추지 못하는 눈초리도 있다.

검찰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어쩜 내가 수사검사라고 해도 지금보다 나은 결과를 내놓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것이 춘향의 인생에 더 도움이 된 것처럼 정권의 수청을 거부하는 것이 검찰조직에는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은 감출 수 없다.

그래봤자 5년이고, 남은 시간만 치자면 3년이 채 안 되는데 말이다. 이러다 검찰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청만 들고 버림받는 퇴기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